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단순한 열정

gowooni1 2011. 1. 28. 23:37

 

 

 

 

불혹을 훌쩍 뛰어넘긴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다른 중년 여성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면 장성한 아들들을 둔 어머니라는 것. 다른 점이 있다면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대학교수에 유명 작가이고 자신보다 열 살 가량 어린 외국인 남자와의 관계에 푹 빠져버린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만 우러나온 글만 쓴다는 '체험적 글쓰기'를 직접 실천하고 있던 아니 에르노이다.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철저히 지켜버리는 그녀의 삶의 방식 덕분에 외국인 남자와의 불륜과정에서 겪는 한 여자의 심리가 소설이란 형식을 빌려 심플하고도 구구절절하게 묘사되었다. 1991년에 프랑스에서 발간되자마자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단순한 열정'이 바로 그 책이다.

 

지난 9월 이후부터 한 남자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말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지적 능력이 동원되는-예상하고 추측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 지 판단하는 모든-행동에는 그 남자만이 관계되고 만다. 그 남자가 무엇을 좋아할까, 이 옷을 예쁘다고 해줄까, 다음번에 만날 때에는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까, 등등을 생각할 때만이 행복해서, 그 외의 모든 일은 의미를 잃고 만다. 늘 하던 일상적인 일은 전부 퇴색되고 오직 남자만을 생각하고 그와의 약속을 기다린다. 연락이 오지 않을 때에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들 정도이면서도 별 의미가 없는 다른 일들, 친구를 만나거나 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오던 일들을 하고 싶지는 않다. 만나봤자 얼마 함께 있을수 없는 그와의 시간이 삶에서 의미가 있는 유일한 일이 되고 말았다.

 

남자는 늘 불쑥 전화를 하고 불쑥 찾아온다. 이미 결혼을 한데다 가정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은 그는 괜찮은 시간 즉, 아내에게 연락을 하지 않아도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보장된 몇시간에만 그녀를 보러 온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므로 그녀는 늘 그의 연락을 받을 수 있도록 대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가 겨우 시간을 내어 찾아오면 그녀는 시계를 풀어놓고 절대 보지 않지만 남자는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놓지 않는다. 남자와의 시간을 최우선으로 두는 여자는 아들들에게도 미리 그와의 관계를 이야기 해둔다. 언제 남자가 올지 모르므로 아들들의 방문 때문에 그와의 시간을 방해받을 수는 없었다. 다 큰 엄마의 연애사에 다 큰 아들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렵기는 하지만, 아들들의 판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그 남자와 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욕망의 시간이다.

 

옳고 그름 따위는 없다. 단지 욕망과 열정만이 존재한다. 그와 관계를 갖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처음 보던 막연한 감정과 달리 무언가가 쌓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정된 욕망이란 자산도 줄어든다. 남자에게 연락이 오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는가에 대해 불안해하지만, 그것에 대한 의심은 만나면 또 그 순간에는 없어진다. 가장 본능적이고도 감각적인 것들이 그런 의심은 불식시킨다. 하지만 욕망과 열정 그 이상은 없다. 처음부터 유대감을 바라지 않은 관계는 욕망을 더욱 증폭시키지만 그것이 끝나야만 할 시간도 착착 다가오고 있다.

 

프랑스에서 볼 일이 끝난 남자는 아내와 함께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고, 버림받은 느낌 속에서 에르노는 한동안 상실감에 휩싸인다. 차라리 집에 강도가 들어 자기를 사정없이 찔러 죽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흘러가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를 생각하는 일도 조금씩 줄어들어간다. 단순한 열정에 휩싸이던 꿈과 같던 시간의 환상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을 때, 술에 취한 남자가 한 번 더 그녀를 찾아온다. 여전히 매력적이고 서른 여덟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그였지만, 예전의 그 남자는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느낀다. 맹목적이고 육체적인 열정에 휩싸일 수 있었던 에르노의 시간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인생의 한 단락으로 장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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