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내 이름은 빨강

gowooni1 2011. 1. 20. 23:27

 

   

 

 

때는 1591년 이스탄불의 으슥한 밤거리. 시내와 조금 떨어진 외곽의 우물에 머리가 박살이 난 채로 떨어진 한 시체의 입에서 나는 살해되었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이 긴 이야기가 이미 죽어버린 자의 목소리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미 죽어버린데다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자의 목소리는 살아있는 목소리로 전달되는 것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책을 읽는 우리는 늘 살아있는 사람들이고 산 자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궁정 세밀화가 중에서도 금박을 입히는 능력이 뛰어났던 엘레강스는, 자신들의 동료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되었다. 엘레강스의 금박 입히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대단한 것이기는 했으니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곧장 오스만 제국의 타격이기도 했다. 앞으로 술탄에게 바쳐질 아름다운 세밀화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금박에 입혀지지 못할 터였다. 금박을 입히는 솜씨가 너무 고상하여 붙여진 엘레강스라는 별명과 어울리지 않게, 그 인품이 별 볼일 없었던 엘레강스는 금화가 묻혀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는 말에 속아 한 밤중의 꼬임에 빠져 살해되었던 것이다.

 

자신보다 열 두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을 사랑하다가 삼촌 에니시테에게 쫓겨나 십 이년이라는 긴 세월을 방랑하고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 벌써 삼십을 훌쩍 넘긴 이 성인 남자 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온 도시에서 여전히 그의 사촌 동생 셰큐레를 사랑한다. 셰큐레가 이미 결혼을 하여 두 남자 아이의 어머니가 되긴 했지만 그의 첫 남편은 사 년 전 나간 전쟁에서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이스탄불의 제일 가는 미인 셰큐레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는 많다. 맹목적인 사랑으로 조심하지 못한 시동생 하산도 그 중 한 명이다. 하산과 카라, 두 남자의 사랑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늙음을 핑계로 어느 남자와도 혼인시키려 하지 않는 아버지 에니시테 사이에서 이 세 명은 갈등한다.

 

당대 오스만 제국은 세밀화의 전성시대로, 다른 어느 시대보다 더욱 많고 정교한 세밀화들이 생산되고 있었다. 페르시아 화풍의 세밀화들은 신성했다. 코란이라는 종교적 관점, 신의 관점에서 그려지는 이 그림들은 절대적 시각이 우선되어야 했기 때문에 원근감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사물은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실제적 크기로 그려져야 했고, 조금이라도 원근감이 살아있는 그림이면 신성모독적인 그림이 되었다. 가장 훌륭한 세밀화가가 되려면 그래서, 자신의 화풍이 절대 살아 있어서는 안되고, 옛 거장이 그려왔던 화풍을 그대로 재현해내야 했다. 개성이라든지 자신만의 화풍이라는 것은 미숙함의 상징일 뿐이었다. 하지만 에니시테의 생각은 좀 달랐다. 유럽 베네치아에서 보고 온 초상화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앞으로 세상을 지배할 화풍은 원근감과 화가들 개성이 각자 살아있는 유럽식 화풍일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당당하게 꺼내기에는 아직 이스탄불의 분위기는 보수적이었다. 그래서 에니시테는, 자신에게도 유럽풍으로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초상화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남몰래 가지고 있는 술탄을 설득해서, 베네치아 화풍으로 세밀화 10점을 그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물론 이스탄불의 가장 솜씨 좋은 세밀화가들을 몰래 동원해서 이 작업은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엘레강스가 죽음으로써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에니시테는 엘레강스를 죽인 자가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있던 당대 최고의 세밀화가이자 서로 동지였던 나머지 세 명의 화가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엘레강스의 솜씨와 비열함을 질투하면서도 혐오했던 그의 동료들, 올리브, 황새, 나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오스만 제국 최고의 세밀화가들 역시, 살인자를 제외하고 자신들 중 한 명이 엘레강스를 죽였다고 직감했다.

 

즉각 자신의 프로젝트를 중단한 에니시테는 곧장 카라를 가까이 불러들인다. 자신의 목숨이 언제 노려질지 모르는 일이니 여태껏처럼 살인자를 집에 불러들여가며 그림을 그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딸을 여전히 사랑하는 카라의 마음을 알면서도 에니시테는 그런 카라를 이용해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수시키려 함과 동시에 엘레강스를 죽인 자를 찾아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런 에니시테의 의지와는 약간 어긋나게도, 어느 날 저녁 마침 아무도 집에 없던 틈을 타 살인자는 직접 에니시테에게 찾아와 자신이 엘레강스를 죽인 장본인임을 밝히고, 에니시테 역시 전과 같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부수어 죽여버린다.

 

연이은 궁정소속 화원들의 죽음에 화가 난 술탄은 지금 당장 살인자를 찾아내라고 명령한다. 만약 살인자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머지 세밀화가들은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다. 자신의 국고까지 오픈하며 카라에게 주어진 시간은 삼일. 나비와 황새와 올리브 중 누가 과연 살인자일지를 알아가는 재미도 재미지만,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 거리를 메우는 물건들이 자아내는 분위기, 가장 화려했던 이스탄불 세밀화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는 진귀해서 흥미롭다. 온갖 잔혹한 형벌과 전쟁들이 난무하던 시대에 사실적으로 그려진 세밀화들에 대한 묘사에는 다소 인상이 찌푸려지기는 하지만. 추리소설처럼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하는 궁금증은 메인 디쉬라고 하기에는 살짝 부족하고, 디저트라고 하기에도 뭔가 아쉽다. 사백 년  전 터키의 생생한 묘사 덕에 생소한 단어들의 낯설음만 조금 극복하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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