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공항에서 일주일을-히드로 다이어리

gowooni1 2011. 1. 18. 15:56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산업이 보다 쉽게 돈을 벌어다 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는 할 테지만, 정신적 근간인 예술이 부흥해야 나라가 더욱 오래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예로부터 다들 알고 있었던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스폰서 엘리자베스 1세는 예술가를 지지한 대부호 모델의 전형처럼 보이고 이는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돈과 예술을, 부자와 예술가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시스템인듯 하다.

 

알랭 드 보통이 히드로 공항에서 머물며 공항의 정경을 문학이라는 예술로 표현하는 데에는 세계 유수 항공사를 몇 개 거느리는 재계의 힘이 바탕이 되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절대군주시대 자신의 스폰서에 대한 극단적 애찬이 요즘 시대에는 조금 촌스러워 보인다는 점이다. 알랭을 지지한 그 회사에서도 그런 요구가 시대에 맞지도 않음을 잘 알고 있었는지 히드로 다이어리에는 공항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는 없다. 그보다 개인적인 시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주관적 찬사는 조금 있을지언정 말이다.

 

갑자기 문학에 대한 관심이 상승한 공항의 높은 관계자 덕분에 알랭은 일주일간 공항에 머물며 그곳에 대한 묘사와 생각을 버무린 글을 써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부자와 예술가들 사이의 애매한 위치적 관계에서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가 과연 괜찮은 건지, 여행을 생활처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공항에서 작가가 늘 그곳에서 더 뭉그적거릴 수 있는 기회를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가늠해보면, 터미널 5 앞에 전용 책상을 배치해 주고 호텔 소피아의 비지니스 룸과 룸서비스 두어번, 식사 무료 쿠폰 등을 받을 수 있는 그 기회, 그것도 부족해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공항의 어느 장소라도 접근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받은 작가에게 그 기회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건 작가로서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글로 표현해내고 싶은 예술적 욕망을 가진 자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렇게 알랭은 일주일간 히드로 공항에 상주한다. 본인이 말하기를 '이름도 근사한 히드로 첫 상주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공항을 지나는 세계 각국의 모든 사람들과 비행기들의 관찰자가 된다. 그는 자신의 데스크에 앉아 때로는 안내데스크에 사람이 너무 많아 필요할 때 즉시 상대될 수 있는 비상 인력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그의 명함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들 중 두 부류-하나는 자신들의 심적 고민을 모조리 토로하고 싶은 사람들, 다른 하나는 유명 작가의 책에 조금이라도 실려볼 수 있길 바라는 사람-들의 고해소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런 자신의 상황을 즐기며 히드로 다이어리에 실릴 글감을 차곡차곡 모아갔다.

 

그의 글을 자주 읽는 사람에게는 늘 그렇겠지만, 알랭의 넓고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나온 독특한 사유와 묘사가 반영된 글을 읽는 것은 또 하나의 지적 즐거움이다. 그의 시각과 뇌를 통해 나온 히드로 공항이라는 곳을 알게 되는 것은 역시 또 다른 재미이다. 그는 철저하게 관찰자로 군림하며 공항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긴 하지만 그의 글에서 그는 절대 철저한 관찰자가 아니다. 자기 글의 주인이 되어 주관적 판단으로 단어들을 배열해 내 히드로의 내외부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본 세계가 이런식이다라는 것을 은근한 힘으로 생각마저 강요한다. 설령 작가가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독자는 그런 느낌을 받는다. 사실 그게 또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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