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갑자기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여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 불쑥 들어와 전화 한 통만 빌려 쓰겠다고 말한다면? 그런데 갑자기 그 자가 전화를 거는 도중에 쓰러져 거실 바닥에 엎드려 죽었다면? 공교롭게도 그 전날 참석한 파티에서 만난 한 사람이, 만약 집 안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었을 때 절대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무조건 택시를 같이 타고 병원으로 가 응급실에서 사망 판정을 받는 편이, 범인으로 몰리지 않고 쓸데없이 경찰에 휘둘리지 않는 현명한 처사라는 것을 알려준다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대화 따위는 까맣게 잊고 당황한 나머지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이 아닌 사람이라면 다르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평소 자신의 인생을 지겹다고 생각했고 명백히 실수한 삶이라고 판단해 어쩔수 없이 살고 있던 사람이라면 말이다. 마침 자기 집에서 쓰러진 남자와 자신은 체구만 좀 다르지 얼굴 생김새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하고 머리 색깔 까지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이 남자의 시체가 부패하여 비대한 살집들이 공중으로 흩어져버리고 나면, 이 집의 진짜 주인인 자신, 서른 아홉살의 독신남이 혼자 비참하게 살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이 지겨워 죽을 지경인 한 남자에게, 전혀 다른 인격으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펼쳐진 것이다.
서른 아홉 독신남, 파리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던 별 볼일 없는 남자 밥티스트 보르다르는 이런 경위로 올라프 질더가 된다. 밥티스트의 인격을 버리고 올라프의 인격을 걸친 채 남은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과감하게 자신의 집을 버리고 짐을 정리하고 죽은 올라프의 지갑과 자동차 키를 들고 올라프의 재규어에 올라탄다. 재규어 안에 있던 자동차 등록증을 보고 올라프의 현재 거주지를 알게 된 가짜 올라프. 진짜 올라프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왜 이 비싼 재규어를 모는 사람인지는 하나도 모른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채, 그냥 올라프 질더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동차 등록지의 주소로 찾아간 곳은 베르사유 근처 대저택이었는데, 가난한 서민 밥티스트 보르다르라면 돈 있는 자들이 남들에게 엿보이기를 즐기며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집이랍시고 경멸해마지 않았던 그런 저택이었다. 하지만 진짜 올라프 질더라면 달라야했다. 그곳은 자신의 집이 되어야 했으므로 그 저택에서 당당하게 기거할 수 있어야 했다. 남들의 시선마저 즐긴채. 그는 당당하게 올라프 질더가 되어 그 집안으로 들어가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진짜 올라프의 아내라고 추정되는,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미녀 지그리드를 만난다. 지그리드는 가짜 올라프를, 자기 남편과 비슷한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하거나 그보다 더 특급 임무를 수행하는 상사 쯤으로 생각하는 듯 하고, 그래서 가짜 올라프를 늘 대접해왔던 손님들처럼 자연스럽게 맞이한다.
거짓말에는 거짓말을 한 사람조차 진실로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자기가 정말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뻔뻔스러운 요구와 거짓을 일삼는 가짜 올라프는 점점 자신이 한 거짓말에 휘둘린다. 지그리드에게 당당하게 음식을 달라고 하고 까다롭게 건포도 빵만을 고집하며 올라프처럼 행동한다. 음식이라면 아무것도 먹지 않지만 고급 샴페인 뵈브 클리코로 영양을 공급하는 지그리드에게 돔 페리뇽을 마시자고 요구하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신과 함께 샴페인을 마시며 뒹굴자고 조른다. 아무리 샴페인이라도 아침부터 내내 마시면 취하게 되어 있고, 취하게 되면 말이 많아지며, 말이 많아지면 실수하게 된다. 지그리드는 올라프에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만 아름답고 품위있는 여자답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멜리 노통의 이야기에서 도덕이나 인과응보나 원점으로의 회귀 따위의, 사람들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결론을 바란다는 것은 우습다. 그리고 그런 점이 노통의 이야기가 가진 몰입력의 근원이다. 이 뒤에 주인공들이 어떻게 될 지, 끝까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가짜 올라프에게, 어머 얘좀 봐, 너 그렇게 막 나가면 안 되는거 아니니? 그러다 다쳐, 라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통은 그런 막 나가는 가짜 올라프의 손을 들어준다. 왕자의 특권이라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살아도 결국 면책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보잘 것 없던 밥티스트가 왕자같은 올라프의 인생으로 바꿔 살 기회를 제시한 첫머리에서 이미 다 준 셈이다.
'문자중독-Reading > 문학*문사철3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이름은 빨강 (0) | 2011.01.20 |
---|---|
공항에서 일주일을-히드로 다이어리 (0) | 2011.01.18 |
언젠가 함께 파리에 가자 (0) | 2011.01.01 |
빵가게 재습격 (0) | 2010.12.29 |
이선 프롬 Ethan Frome (0) | 2010.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