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몇 개만 읽어도 아, 이건 그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편이 좋을 수 있는 이유는 확실한 개성 때문이겠고, 아닌 이유는 조금 지겹다거나 한계가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겠다. 그래서 아마 로맹 가리는 다른 필명으로 쓴 소설로 공쿠르 상을 받았을 때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운운하던 심사위원들을 역으로 골려준 셈이니까. 그렇다면 하루키는 삼십 년 전 소설이거나 최근 소설이거나 그만의 색채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로맹 가리처럼 고의적인 장난을 칠 수는 없을 것 같다.
빵가게 재습격은 그가 아직 상실의 시대를 쓰기 직전에 (문장 연습을 하는 셈으로 썼다고 추정되는) 단편 여섯 개가 수록된 소설집이다. 전부 남성인 나가 화자이고 직업이나 처지는 달라도 비슷한 성격이다. 하루키의 자아가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무리인 이 주인공들로 늘 그렇듯 나의 이동과 움직임에 맞춰 소설의 시간은 흘러간다. 이 '나'들은 위스키를 좋아하고 칠팔십 년대 미국 대중을 사로잡은 음악 또는 클래식을 듣고 여자들과 이런 저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고 먹는 것과 섹스에 대해 관심이 많은 남자이다. 아 또?라며 색다름을 원하는 사람보다 음 역시, 하고 하루키만의 변치않는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더 실망시키지 않을 단편들이다.
빵가게 재습격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결혼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신혼부부는 아직 집안일의 분담 혹은 둘 만의 생활 패턴에 대해 아무런 기준이 없다. 그래서 죽도록 배가 고픈 한 밤 중에 식료품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난감하다. 냉장고를 뒤져봐도 나오는 건 맥주 몇 캔 뿐이고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겪은 배고픔이란 것은 태어나서 지금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라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밖에 나가 무언가 사 먹기엔 너무나 늦은 시간이고, 아내는 그런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은 하기 싫다고 말한다.
하는 수 없이 배를 곯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나는 문득 예전 빵가게를 습격한 사건을 기억한다. 아직 학생이고 돈이 없던 때, 역시 너무 배가 고파서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을 때 친구와 함께 동네 빵집을 습격했다. 왜 하필이면 큰 곳도 아니고 자그마한 동네 빵집이었어? 하는 아내의 물음에 그저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큼의 빵만 있으면 충분했거든, 하고 싱겁게 대답한다. 더 싱거웠던 일은 큰 맘 먹고 습격한 빵가게 주인은 선뜻 빵을 내어 준다. 단 한가지 조건, 브람스를 몇 분간 함께 듣는다는 비상식적인 조건 하에 말이다. 나쁜 조건은 아니었고 그들은 나름 정당한 교환을 한 셈이 되었다.
습격한 보람도 없이 정당한 노동을 하며 얻게 된 빵 덕분에 학생인 나는 며칠간 배부르게 지낼 수 있게되었지만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석연찮아 한다.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배가 고픈 이유는, 그 때 제대로 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후유증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새벽에 외식을 하러 나가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으로 봤을 때 비정상이라서 싫다고 말하면서도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아내. 그녀는 더 비상식적인 제안을 한다. 그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빵가게를 재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산 지 2주 밖에 되지 않은 아내의 진면모를 알 수 없는 나는 엉겹결에 그 제안을 승낙한다.
둘은 새벽에 도쿄로 나가 습격할 빵가게를 찾는다. 이 시간에 문을 연 빵가게가 있을까?하는 나의 물음에 도쿄는 넓어, 어딘가 반드시 있을거야, 라고 능숙하게 대답한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빵가게는 맥도날드. 총을 들고 점원 셋이 가게를 지키고 있는 맥도날드에서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부부는 빅맥 삼십 개를 포장하라고 협박한다. 무덤담한 표정의 점장도 만만찮다. 차라리 넉넉하게 돈을 드릴테니 다른 곳에서 사 드시면 안 될까요. 물론 통하지 않는다. 셋은 서로를 힐끔 쳐다보며 묵묵히 빅맥 서른 개를 구워낸다. 아내는 콜라 두 잔도 주문한다. 콜라 두 잔의 값을 치르면서 자신들의 목적이 오로지 배를 채우기 위한 빵을 강탈하기 위함이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 하루키의 엉뚱한 유머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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