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체스 두는 여자

gowooni1 2010. 11. 29. 19:21

 

 

 

 

신의 애정에도 차별이 있다면 유난한 애정 속에서 빚어졌을 그리스 섬 낙소스. 지중해 한가운데 불쑥 솟아 있는 이 아름다운 섬에는 다른 곳처럼 평범한 일상들이 흐른다. 사람들과 개들과 갈매기들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어제와 같은 방법으로 하루를 채운다. 마치 몇 천년 전부터 변함없이 그 곳에 고정되어 그리스 섬의 한적함을 보태려는 하나의 풍경처럼. 주민들은 세계 각지에서 휴가를 즐기러 오는 여행자들의 지갑에 기대어 삶을 영위해가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의 임무는 충분하다. 그들이 거기에 있음으로서 그리스 섬의 이미지는 완벽해진다.

 

엘레니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낙소스 섬의 이미지 자체였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찾아오는 그 값비싼 광경이 엘레니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았다. 태어나서 거의 섬 밖을 나가보지 않은 엘레니는 지중해의 찬란함이나 섬과 바다가 어울리며 자아내는 섬세한 감동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매일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정신을 쏟아야 하는 마흔 두 살의, 아름답지도 특별히 우아하지도 않은 평범한 아낙네였고 역시 평범한 토박이 남자의 아내였으며 두 아이의 엄마였다. 그녀가 다른 그리스 아낙네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단지, 집안일에 파묻혀 지내는 것보다 세상과 조금이라도 소통하고자 디오니소스 호텔의 룸메이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흔 두 평생 어딘가에 열정을 불살르며 살아본 적이 없는 엘레니였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날 특별한 세계가 이상한 감동을 가지고 그 평범하고 안정되던 삶에 침입한다. 검은 색과 흰 색의 체크무늬로 구성된 예순 여덟 칸이 조화를 이룬 세계. 파리 연인들이 머물던 방을 치우던 엘레니는 우아한 커플들의 지적 유희에 마음이 빼앗겨 버리고, 난생 처음으로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운다. 곧 있으면 다가올 남편 파니스의 생일에 체스판을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평범함이 미덕인 낙소스에서 가장 완벽한 미덕을 지니고 있던 파니스에게 체스판 선물은 잠깐의 놀라움을 선사하기 충분할 뿐이었다. 그는 아내의 서프라이즈 선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테이블에 방치하여 먼지가 쌓이도록 놔둔다. 엘레니가 고민 끝에 몇십년 동안 뵌 적도 없는 쿠로스 선생님을 찾아가 특별히 부탁을 해서 사온 전자 체스판이건만, 파니스는 낙소스적 미덕이 너무도 충만하여 체스라는 지적 유희를 즐기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파니스와 저녁 시간에 체스를 두며 아름다운 파리 연인들의 생활 방식을 나눠보려던 엘레니의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

 

아테네까지 가서 공수해 온 최신식 전자 체스판의 가장 큰 장점은 혼자서도 체스를 둘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장된 컴퓨터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이나 관심도 없을 파니스에 비해 훨씬 나은 대국 상대였다. 엘레니는 그렇게 남몰래 전자 체스판과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껏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는 사색의 세계, 집중의 시계,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몰입의 세계는 지금껏 꽤 오랜 시간을 평범한 주부로서 살아온 엘레니에게 그토록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엘레니는 체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고 진짜 사람과 대결해 보고 싶었으며 더 잘 두고 싶었고 궁극적으로 이기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내팽개치고, 자신들과 동족이 되기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려던 엘레니에게는 너무도 많은 장애가 도사리고 있었다. 엘레니와 평생을 함께 해 온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서 멀어져 가려는 엘레니를 위험한 인물로 혹은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으로 간주하고, 엘레니를 다시 자신들의 행성으로 돌아오게끔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파니스는 이혼을 고민하면서 위협적으로 엘레니를 대했고, 늘 다른 사람의 험담을 공유하던 친구 카트리나 역시 엘레니의 험담을 하고 다녔다. 오직 디오니소스 호텔의 여주인만이, 아무리 체스의 세계에 빠졌어도 자신의 임무만은 확실히 하는 엘레니를 호의적으로 받아주고 그녀에 대한 소문에 대해서는 침묵해 줄 뿐이었다.

 

주변의 비호의적인 환경 속에서 엘레니를 지탱해준 건 체스와, 함께 체스를 두는 사람 쿠로스 선생 덕분이었다. 쿠로스는 옛 제자의 일취월장하는 체스 실력에 감탄을 하면서도, 독특하고 창의적이던 엘레니의 체스가 점점 형식화되어 간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자신의 제자가 사십 이년간 숨겨온 재능을 발견한 스승으로서 엘레니의 재능을 그대로 썩혀버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쿠로스는 몇 십년간 연락을 끊고 살았던 친구 코스카에게 연락을 해서 엘레니의 대국 상대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코스카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상대였고, 엘레니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껍질을 깨고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간다.

 

그런 엘레니를 위해 스승 쿠로스의 마지막 깜짝 선물은 비밀. 하지만 일평생 자신만을 위해 살며, 다소 괴팍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의 시간을 절대 남에게 희생하지 않았던 쿠로스가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다른 사람의 성장을 진심으로 돕는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건, 진부하고 덤덤하긴 해도 감동은 감동이다. 마지막으로 엘레니가 자신 스스로 구축한 세계를 간직한 채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고 낙소스의 일원이 될 수 있는지도 여운의 미학에 충실하여 비밀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