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안해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거의 한가지로 말할 수 있다.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내 것이 아닐 때. 물건의 경우 갖고 싶은 것을 사면 그만이지만 사람 마음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있지도 않고 원한다고 전부 얻을 수도 없다.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사면 그들 사이에서 위상이 올라간다. 결국 마음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과 동일하다. 한 사람의 반려자가 되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에서부터 한 조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고픈 공적인 욕망까지 지위에 대한 욕망은 널리 퍼져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근원을 지위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늘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습성상, 그토록 바라던 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해도 우리는 금방 그 위치에 대한 만족을 잊고 말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 일반 서민의 삶이 500년전 한 나라의 왕의 삶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편리한 교통과 적절한 부, 원하는대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기회, 훨씬 위생적이고 맛있는 음식과 생활방식 등을 우리는 누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왕과 같은 만족감으로 행복감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다. 우리의 비교대상이 오백년 전 왕이 아니라 우리와 비교 가능한 이웃이어야 하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불만과 불안은 마음만 먹으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지위일 경우에만 성립된다. 중세 농민들은 봉건 지주나 왕에 대해 불만을 가질 생각조차 안했다. 그 위치는 아무리 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위치이므로 욕망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현대 사회와 비교하면 이런 식이다. 만약 절대적 신이 존재한다해도 우리는 신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신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같은 지위를 얻고 싶다는 욕망도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만인은 기회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상이 만연하고 있는 요즘, 우리는 옛날 사람들보다 느끼는 불안이 많을 수밖에 없다. 마음만 먹으면 개인 노력의 여하에 따라 한 나라의 왕과 같은 위치에도 설 수 있는 21세기는 욕망하지 못할 것이 거의 없다. 예전 내 지위의 비교 대상이 고작해봤자 친구들이나 이웃 사람들이었다면 요즘은 그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모든 사람이 왕과 같은 삶의 질을 영위하고 있는 좋은 세상이지만 옛날 사람들보다 느끼는 욕망은 커졌다. 가난하지만 마음이 편하던 옛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마음이 불안한 현대인들의 삶의 질은 정말 좋아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보통은 이 불안에 대한 해답을 몇가지 제시한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안 등으로 나누어 작가의 해박한 지식의 세계로 또 한번 인도한다. 해답의 기본 방향이란 지위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달리 생각해보는 식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소크라테스는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애초에 없었다. 우리가 타인에게 '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야'라는 소리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각 의기소침해진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렇다. '네 눈에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 고로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철학은 지위에 대한 가치판단의 중심을 아예 내쪽으로 끌어온다. 이는 꽤 괜찮은 방법처럼 여겨진다.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접근도 가능하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남들과 다른 뭔가를 이룩하고 싶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남과 달라야 명예로운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런 생각을 근본부터 바꾸어 버렸다. 남들과 달라야 명예롭다는 생각에서 남들과 같아야 좋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은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지위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제거해버렸다. 특정 지위에 대한 욕망을 갖지 않아도 저절로 주어지는 현재의 위치가 최고라고 하면 사람들은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보통이 생각하는 최고의 해결 방법은 아무래도 보헤미안인 것 같다. 남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부wealth에서 벗어나 마음의 부, 감정의 부, 친구의 부 같은 것을 첫번째로 여기는 보헤미안들에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성공의 잣대를 강요할 수도 없고, 부러워하길 바랄 수도 없다. 처음부터 지위에 대한 기준이 타인과 다르다는 점에서 철학자나 예술가나 기독교인과 같지만 그 기준에서 뭔가가 다르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그의 보헤미안적 기질을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불안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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