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은 이루지 못한 꿈과 공존할 때 가치를 상실한다. 가지지 못한 것을 더 그리워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습성 때문이다. 게다가 채우지 못한 욕망은 사람에 따라 이상하게 변형되어 자기만이 아니라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 만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어쩔 수 없다. 가진 것에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보다 얻지 못한 것 허전함을 느끼는 사람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짙다. 어쩌면 인류는 후자 때문에 지금껏 진보라는 이름으로 욕망을 채워왔는지도 모른다.
월 스트리트의 31만 달러 이상 고소득을 벌어들이는 변호사 벤은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아들 딸, 뉴욕 교외의 멋진 집까지 가지고 있는 서른 여덟의 중년 남자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하지만 실상이란 파고들면 들수록 별로 아름답지 않은 법. 아내 베스는 소설가의 꿈을 꾸며 젊은 날을 보내다가, 어쩌다 생긴 아이들 때문에 그리고 그 뒤치닥꺼리 때문에 자신의 꿈을 상실하고 그 분노를 전부 벤에게 쏟아부으며 삶을 저주하는 그러나 매력적인 여자다. 벤 역시 사실은 오랫동안 사진가로서의 꿈을 저버리지 못한 채 젊은 날을 방황하다 아버지의 사주로 변호사의 길로 접어든 아마추어 사진가다.
베스의 피해망상적인 삶도, 그래서 벤이 벌어들이는 돈을 엄청난 가격의 앤티크 가구에 쏟아붓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더 나쁜 것은 둘의 삶이다. 무려 158일이 넘는 기간동안 키스조차 하지 않은 이 부부의 관계는 파탄이 나기 일보직전이다. 벤은 돈이라는 연고로 뼛속 깊이 베인 상처의 피부를 아물게 하고자 급급하지만 이미 살은 두동강이 났다. 베스가 옆집 남자 게리 서머스와 바람이 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게리는 벤이 그토록 염원하던 사진가의 꿈을 아직도 꾸준히 이루어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남자인데 허풍에 비해 실력은 개뿔 없는 실속없는 남자라 더욱 용서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자신의 인생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는 한 남자의 불쌍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의 성격은 반전된다. 아무것도 모른척 하고 게리의 집에 찾아간 벤이 그만 우발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와인 병을 게리의 머리에 휘둘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깨진 병의 주둥이를 게리의 목 뒤에 바로 꽂아버렸다. 허풍선이 아마추어 사진작가 게리 서머스는 자신의 덜되먹은 인격 때문에 개죽음을 당했지만 문제는 벤이다. 성실한 미국 중산층 가장으로 왕성한 소비활동을 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인생을 살아온 벤이 고작 15분만에 1급 살인범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거기서 벤은 자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교도소에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월가의 똑똑한 변호사 벤은 이후 사건의 정황이 어떻게 돌아갈 지 훤히 안다. 이를 이용해 완전범죄를 저지른다. 어차피 베스와의 관계는 끝이 났고 그녀의 남자 게리는 죽었고 자신이 돌아갈 곳은 없다. 벤은 게리의 시체에 자신의 옷을 입히고 요트에 태운 후 불을 지른다. 벤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고 진짜 벤은 게리 서머스라는 인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고작 아버지가 유산으로 맡긴 신탁기금으로 살던 게리의 라이프스타일은 벤이 그토록 꿈꾸었던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채우는데 일조한다. 벤은 동부 사람들을 마주칠 가능성이 가장 낮다고 판단한 서부의 몬태나 주에서 아파트 하나를 빌리고 정크푸드로 생활하며 매일 사진을 찍는 걸로 시간을 보낸다. 자신이 늘 꿈꾸었던 삶이 사실은 이렇게 쉽게 이룰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벤의 사진은 지방 신문사에서 큰 호응을 얻고 갑자기 전시회를 여는 등 유명세를 타게 된다. 죽은 게리는 물론 벤 본인도 그토록 꿈꾸었던 성공한 사진가로서의 인생은 그런식으로 어이없이 이루어지려는 찰나다.
벤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생존과 실존 사이에서 무엇을 더 우위에 두고 있는지 각자의 삶에 대한 반성이 첫번째로 다가오고, 생존을 넘어 실존을 이룩했을 때의 인생이 실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허망할 수 있다는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늘 제2의 인생을 꿈꾸지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제1의 인생이 실은 더 우선적으로 둔 가치를 반영한 삶일 경우가 많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자기만족적 핑계 하에 직접 선택한 삶을 곧이 곧대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제1의 인생이 없어졌을 때 삶이 어느 정도로 허망하게 다가올 지 가늠해볼 수 있으며 늘 꿈꾸는 제2의 인생이 실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가벼운 경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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