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불안의 황홀

gowooni1 2010. 9. 18. 19:42

 

 

 

 

불안해야만 황홀한 사람들이 있다. 안락하고 평온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불안해하고 무언가 얻지 못하는 중이거나 자신의 이상과는 한참 부족한 현실 때문에 불안한 현실에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 그들은 안락한 현재가 자신의 영혼을 구차하게 갉아먹어내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도록 만든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불안의 극단으로 몰아쳐 더 높은 무언가를 추구하도록 다그친다. 보통 가난한 예술가들이 여기에 속하기는 하지만 부를 누리고 있는 예술가라 해서 생활이 꼭 안락하다고 할 수 없다. 후자는 몸은 안락해도 늘 가슴속에 불안의 근본적 원인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락한 현실 속에 남들과 똑같은 개성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느냐, 고되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며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은, 이미 고민을 시작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후자에 더 가깝다. 표면적으로는 전자의 삶을 누리고 있는 듯 보여도 내면적으로는 끊임없이 후자의 스타일을 꿈꾸고 있다면 그것 역시 후자에 가깝다. 전자는 대부분 후자들의 고민을 해야 한다는 가치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평범한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들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고 굳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시인이건 소설가건 화가건 대부분 예술가라는 족속들은, 그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데, 대부분 예술가들의 작품은 생계를 유지할 만큼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른 대책을 세워 살면서 자신의 본업에 소홀해지다 결국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시인이 시를 써야 시인이지 회사를 다니는 중에 시인일 수는 없다. 소설가의 정체성은 소설을 쓰고 있을 때만 유효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만 화가가 된다.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정체성을 찾을 일이지 어쭙잖게 시집 하나 냈다고 시인이란 명함을 내밀고 다니면 우습고 단편 몇 편 냈다고 소설가라고 떠벌리고 다니면 같잖다.

 

예술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몸뚱이를 지구상에서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남들과 같은 직업을 갖는 사람들의 고뇌는 에셔의 작품처럼 모순적으로 순환되는 구조다. 이 사회에서 시간제 알바를 하지 않으면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할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을 확보하기는 힘들고 알바를 하면 생계 유지가 힘들다. 생계 유지를 위해 적당한 회사에 들어가면 몸을 유지하기 위한 돈은 적당히 들어올 지 모르나 예술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을 얻기가 힘들다. 허나 예술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구차한 생계유지의 현실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부족한 시간에서나마 추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예술을 구축하는 시간 속에서만 풀 수 있다.

 

그러므로 잘 안팔리는 예술가가 자신의 본성을 충족시키며 적당히 생계유지를 하며 살려면 잠을 안자는 수밖에 없다. 잠을 자는 시간을 줄여 생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자신의 예술을 한다. 진정 예술가의 혼이 가슴 속에 살아 있어 그것을 분출하지 못하고는 잠을 이루기 힘든 사람들에게 이 처방은 상당히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예술가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24시간을 하루로 살아낼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억지다. 예술가도 사람이고 사람의 생체 시계 사이클은 24시간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고로 대부분의 인생이 늘 그렇듯 예술가의 인생 역시 아이러니다.

 

이런 모순적 사이클에서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준 소설가 김도언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일기다. 대부분 사람들의 일기는 작성과정 중 독자를 인식하지 않으므로 자의식 덩어리인 글이 되곤 하는데 사실 김도언의 일기에도 자의식에 숨막히는 문장들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일기이므로 봐주자. 일기치고 그의 글은 기본적으로 소설가의 문장이므로 독자를 의식한 글이고 고로 재미도 있다. 재미가 없다면 뭐하러 나와 관계도 없는 먼 나라 사람의 개인사가 담긴 일기를 시간을 들여 읽겠느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