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논리로 점철된 이 사회에서,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믿음이 판을 치고 있는 아래 회색인이라는 뉘앙스는 부정적이다. 어디서건 중도자는 환영을 받기 힘들다. 회색인의 속은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적이라도 그 속을 확실히 알 수 있는 편이 낫다. 하지만 중도가 미덕이 되지 못하는 사회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다양성을 존중한 로마나 신라가 천년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다양성의 인정은 다양한 극과 다양한 중도를 인정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미국의 편을 드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팍스 로마나를 이어 팍스 아메리카나를 재현해 낼 수 있는 미국의 저력은 수없이 많은 회색인을 인정했기 때문이고, 박정희나 전두환을 비롯한 독재자가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너저분한 명예를 얻게 된 까닭은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던 까닭이다. 만약 박정희가 수없이 많은 다양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권력을 외부에 하나 둘 씩 이양을 했다면 빅토리아 여왕이 누릴 수 있었던 오랜 전성기를 역사에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반공을 제1조를 내건 제 3공화국에는 번영의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론을 설파하는 지식인들을 간첩으로 몰아댔다.
회색인 독고준은 이런 독재 정권의 피해자다. 이 말에는 모순이 있다. 회색인이라는 말 자체가 중간을 차지한다는 입장인데 극단을 추구할때나 간첩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독고준이 독재정부의 희생자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하지만 독고준은 밍숭맹숭한 회색인이 아니라 극좌와 극우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회색인이 된 것이다. 짙은 회색과 옅은 회색을 넘나든 게 아니라 진한 검정과 새하얀 화이트를 넘나들었다. 둘의 경우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회색을 얻게 된다.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부족할 것 같은 이미지의 회색이라도 경우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결과가 같은 회색은 같은 회색이 될 수 없다. 자신의 몸을 사리느라 그 어느 것에도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회색과 각각의 경우마다 확고한 입장이 있어 검은 색과 하얀색의 치열한 서열 다툼으로 얻게 된 회색은 확연히 다르다. 처음부터 개성이 없던 사람이 말년에 들어 여전히 초년처럼 개성이 없는 것과, 초년에는 뚜렷한 개성으로 인생을 살다가 말년에 중용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적당히 숨길 줄 알게 되어 개성이 없어 보이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어떤 쪽으로 인생을 살아야 할 지는 각자의 개성과 판단에 따를 것이다.
독고준이 극단적 회색인이라는 근거는 그가 결코 다수를 응원한 적이 없었다는 것에 있다. 그는 늘 소수자를 존중하고 자유와 개성을 옹호했다. 군중과 집단은 개성을 묵살하고 자유를 사치라고 생각하며 소수자는 무시해야 마땅한 것이라 여긴다. 독고준이 문인간첩단으로 몰리게 된 것은 그의 개인적 성향도 있겠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이유가 더 크다. 독재로 점철된 사회에서 소수의 개성과 자유를 옹호한다는 것은 한 국가의 존재 이념을 기둥부터 흔들기 위한 시도로 오해받기 쉽다.
독고준이 실존인물이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작가가 선배 문인이 창조한 캐릭터의 후반기 생을 상상하여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도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그런 독고준이라는 캐릭터를 이용해,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후반의 한국 정치 문화 문예의 정세와 세계가 돌아가는 흐름을,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여주고 느낌을 설명해주고 싶었던 듯하다. 전 세계의 정치와 문화와 예술의 분야에 대한 반세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서 동인 문학상을 거부한 이유도 어느 정도 타당함이야 있기는 하겠지만, 대중이 읽기 위한 재미와는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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