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이나 발자크가 글을 쓰던 시대에도 분명 수없이 많은 작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의 검증을 거쳐 그 수없이 많은 작가들의 이름은 사라지고 스탕달과 발자크의 이름만이 후대에 전해졌다. 그건 현재 이 땅에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을 무명의 작가들에게는 씁쓸한 사실이 되고 이따금 글의 생산능력을 저하시키는 원동력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무명작가들이 좌절하지는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록 보잘것 없는 재능일지라도 그들이 끝없이 글을 써나갈 수 있는 이유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중 간혹 팬도 있어주는 덕분이다. 애초에 글을 쓴다는 행위가 고독하고 자기 중심적 생각의 산물이라 가정하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글쓰기를 멈춘다는 것은 오히려 삶의 보람을 스스로 침식시키는 자살행위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생각과 맞는 독자를 발견하면 드디어 세상과 소통의 연결고리를 찾게 되고, 그 때는 자기본위적 글쓰기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요즘의 우리가 수없이 반복해서 보고 눈물을 흘리는 드라마나 영화 플롯은 이미 몇 천 년 전의 그리스인들도 몇 천 번 우려먹었던 플롯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자신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만하는 사람들 이전에 수 억명의 꼭 같은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 나고 죽었다. 어떤 글을 읽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도 그와 같은 종류의 감동을 재생산 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세상에 제일 처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면 실은 표절이라는 말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중독이 되기 위해서는 책에서 자신의 평소 신념과 비슷한 것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 첫번째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책에서 가지가 쳐져 나와 여기 저기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다 죽은, 혹은 생존한 사람이 이 땅에 많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도 필수적이다. 그렇게 넘나드는 책읽기를 하다보면 서서히 책에 중독이 되고 자신만의 생각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스스로의 생각시스템을 구축해가는 독자들은 그들이 읽은 수없이 많은 책 속에서 겹쳐지는 사상을 접하게 되고, '결국 이 생각도 저 생각에서 얻게 된 거군'하는 당연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결국 표절은 우스운 논리다. 내가 생각한 것도 사실은 누군가의 생각에서 얻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정말 혼자만의 오롯한 생각에서 나온 깨달음도 있기 마련이지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타인을 찾기는 이 정보화가 생활화된 사회에서 식은 죽 먹기다. 그것도 거쳐야 할 과정일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생각을 따라가다 얻게 된 세상의 진리가, 실은 나보다 경험이 많은 남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진리였음을 파악해가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면 섣부른 자만과 어설픈 깨달음을 피할 가능성이 커진다.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은 표절에서 시작한다. 마흔을 훌쩍 넘긴 소설가가 간암 말기로 죽어가는 중학교 시절 선생님을 찾아간다. 거의 삽십년 만에 보는 이 선생님은 난데없이 '자네는 왜 아직도 반성문을 써오지 않는가' 란 말로 병상에서 제자를 나무란다. 백일장에서 장원을 먹었던 소설가의 글은 사실 학생 잡지 속의 글을 본떠와 플롯을 변형시키고 살과 옷을 입혀 만들어낸 것이었고, 선생은 그 원작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생인 제자에게 선생이 시킨 숙제는 원고지 오백 매짜리 반성문을 써오는 것. 소설가는 삽십년이 지나 죽어가는 선생님을 위해 반성문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통해 생애 처음 작품이 표절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한 소설가가 서서히 그 사실들을 인정해나가고 동시에 자신의 하나뿐인 열혈선생독자를 통해 자신의 글에 대한 자각도 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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