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순수 박물관 - 오르한 파묵

gowooni1 2010. 6. 23. 14:40

 

 

 

 

 

몽고 알타이 지역이 기원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에 붙여진 알타이 어군은 한국어나 일본어와 함께 몽고어와 퉁구스어를 포함하는데 거기에는 터키어도 포함된다. 언어에는 지역 사람들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터키 사람들은 유럽 쪽 나라 중 가장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반대로 그 나라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케밥 정도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터키에서 배출한 오르한 파묵이 그려내는 이스탄불의 모습은 그 곳에 직접 찾아가지 않는 이 쪽 편의 독자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이국에 대한 정보다. 비록 작가의 태생적 이유 덕분에 아주 대중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파묵은 아름답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선택 받은 자들인 상류계층이다.


순수 박물관 역시 터키 상위 1% 계층의 남자인 케말의 눈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케말은 서른 살의 잘 나가는 청년이고, 유럽 문화를 배워 온 지적이고 교양있으며 역시 자신과 같은 부류의 아름다운 여자 시벨과 약혼할 예정이다. 케말의 인생은 더 이상 부족해 보일 것이 없으며 앞으로 펼쳐질 인생도 지금까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불행과는 애초에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그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여성이 등장한다. 퓌순. 그녀는 엄격히 말하자면 케말과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먼 친척으로 케말보다 12살 연하다. 미인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외모는 퓌순의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영혼을 치장해주는 장신구에 불과하다.


자신의 약혼녀 시벨에게 가방을 선물해주기 위해 들어간 샹젤리제 부티끄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퓌순에게 한눈에 반한 케말은 그녀가 작년에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올해 재도전하고 있는 상황을 핑계 삼아 수학을 가르쳐 주겠다 하며 멜하메트 아파트로 그녀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키스는 수없이 해봤지만 끝까지 가보지 않은 열 여덟살의 퓌순과 '끝까지 가는' 사랑을 나눈다. 퓌순과 케말은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 불같은 열정으로 황홀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그 비어 있는 멜하메트 아파트에서 만들어 간다. 둘이 서로에게 더욱 끌릴수록 퓌순은 곧 있을 케말의 약혼식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며 시벨이 아닌 자신을 선택해 줄것을 은근히 암시하지만, 인생의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는 케말에게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서른 살의 앞날이 창창한 케말에게는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만 보인다. 즉 자신은 자신과 어울리는 지적 교양을 갖춘 여성과 번듯한 가정을 꾸리며 상류 사회에서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동시에 남들이 숨이 막혀할 정도로 매혹적인 여성을 애인으로 두며 불같은 사랑을 나누는, 그런 이중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케말의 약혼식이 지난 다음 날부터 퓌순은 멜하메트 아파트에 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약혼식에 화가 났거나 대학 입시에 또 한번 실패한 것을 자책하느라 오지 않는 거라고, 케말은 지레 짐작한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지나가고, 퓌순이 일하던 상젤리제 부띠끄의 마담에게서 그녀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와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칠듯이 아픈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쥐며 겨우 그녀의 가난한 골목길에 위치한 집으로 찾아 갔을때, 퓌순이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케말의 고통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케말은 더 이상 시벨과도 사랑을 나눌수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퓌순만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퓌순을 보지 못하는 고통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아파트에서, 그녀가 피우고 비벼 끈 담배 꽁초에서,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는 매트릭스 위에서, 그녀의 손길이 한 번이라도 닿았던 모든 물건들을 통해서만 아주 조금 치유될 뿐이다. 결국 케말은 심리적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성생활이 불가능한 시벨과 파혼을 하고 오직 퓌순을 찾아, 그녀의 자취를 찾아 자신의 모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순수 박물관은 한 여자에 대한 오랜 시간에 걸친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그녀와 조금이라도 관계된 것이 있는 물건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쓰레기이고 하찮은 것이라도 전부 수집한 남자의 집착과도 같은 사랑이다. 하지만 집착이라고만도 볼 수 없는 것은 케말의 순수함 때문이다. 고작 44일간의 격정적 관계 때문에 자신의 모든 기반을 잃어가면서까지 퓌순만을 찾고, 겨우 찾아낸 퓌순을(이미 결혼을 해버린) 8년간이나 특별한 육체적 관계도 없이 그저 그녀 옆에서 함께 숨을 쉬기 위해 찾아간 케말의 영혼은 퓌순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소일거리-저녁을 먹고, TV를 보고-로 시간을, 인생을 채우기 위해 살았던 케말은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도 같았던 퓌순을 기념하고자 박물관을 세웠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케말에서 오르한 파묵 작가 본인으로 바뀌며, 파묵은 케말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퓌순의 미인대회 사진을 박물관에 전시하라고 한다. 올해(2010) 개관하는 순수 박물관에 퓌순의 사진이 전시 되어 있는지가 궁금해서라도 이스탄불에 가보고 싶다. 만약 정말 퓌순의 사진이 있다면, 오르한 파묵이라는 한 작가의 머리에서 상상해낸 세계가 실존해 있었다고 믿게 만드는 작가의 탁월한 거짓말에 완벽히 속아넘어 갈 것 같다.


순수 박물관을 읽은 사람은 책을 가지고 이스탄불에 가면 '순수 박물관'에 1회 무료 입장할 수 있다. 입장권이 책 속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책을 끝까지 읽어본 사람만이 미소지으며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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