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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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이 뚜렷하진 않지만 대신 무난하여 많은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쪽이 '주류'라면 그 반대, 개성이 확고하여 대중의 호불호가 갈리는 쪽은 '비주류'라 일컬을 수 있겠다. 만인의 연인이나 마이 웨이를 걷는 이나 외롭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고독의 정도를 따지자면 아무래도 비주류의 그것이 주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비주류가 형성하는 매니아층은 그 정도가 훨씬 분명하니 위안이 될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서 글쟁이의 길을 찾았다고 하는 노희경은 엄밀히 분류하면 비주류에 가깝다. 그녀의 드라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적은 없지만 언제나 매니아층을 형성한다. 그녀가 스크린에 펼쳐가는 이야기 방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준하게 포진하고 있기에 그녀의 드라마는 생명력을 얻는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에서 읽은 어느 한 줄이 기억난다. 하늘이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좀 더 큰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시청률을 주지 않는 거라고. 시청률에 울고 웃는 드라마 작가에게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있을까 싶다.
드라마 작가들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 본다. 글을 써서 먹고 살 길은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이면 드라마를 쓰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영상이 모든 것을 제압하는 시대에 드라마야 말로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을 대중에게 선사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 사람, 그래서 그 길이야말로 가장 글쟁이로서 먹고 살기 수월하고 또 영광도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수단이 탁월하기에, 자신의 사명을 수단에 맞춘 사람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그 분야라고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좀 달라 보인다. 그녀의 이야기는 수단에 맞췄다기 보다는, 시청률에 연연한다기 보다는, 자기가 쓰고 싶었고 전달하고 싶었던 내용에 충실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 생각하는 희곡 작가들의 메시지에서 얼마나 깊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이야기의 깊이로 따지자면 그녀도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인다. 허나 노희경이라는 작가의 색을 보다 짙게 만드는 것은 스토리의 복잡다단함에서 나오는 감탄이라기 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의 깊이, 여운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제목에서 비추듯 비극적 상황 설정에서 시작된다. 평생 남편과 자식, 시어머니의 뒷바라지를 해온 우리 시대 전형적인 '엄마'가, 하도 아파서 남편이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찾아가 진단을 받아보니 암 말기로 죽음이 예고된 상태. 장성한 자식들 뒷바라지로도 모자라 노망든 시어미를 모셨어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기꺼이, 그리고 즐기며 그 삶을 살았다. 그녀의 가장 큰 비극은 남편이 의사인데도 그 덕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고된 대로 그녀는 죽고, 가족들은 엄마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최루탄성 눈물을 쏟게 한 채 끝난다.
그녀의 대본을 읽고 있으면 대화만으로 전개할 수 있는 스토리의 힘이 상당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심오한 상황의 묘사나 인물의 내면적 깊이에 대한 서술이 없어도 단지 사람이 주고 받는 일상적인 말로도 서사는 진행된다. 깊음을 가볍게 풀어나갈 수 있는 건 인물의 심오한 내면적 갈등을 가볍게 대화로 표출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건 인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성찰에서 기인한다. 그녀 덕분에 희곡작가들의 인간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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