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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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헬름은 사십대 중반을 달리고 있는 가장이다. 가장이긴 한데, 그 책임만 있다. 그에게는 돌아갈 집도, 따뜻하게 맞이해줄 아내도, 그를 보고 싶어하는 자식들도 없다. 집을 나와 브로드웨이 근처 글로리아 호텔에서 머무는 윌헬름에겐 그를 별로 그리워하지도 않는 아들 둘과 양육비 명목으로 돈 만을 요구하는 차가운 아내가 어딘가에 존재할 뿐이다. 몇주 전 직장을 잃어 돈줄도 막혔는데 설상가상으로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그의 아버지 애들러 박사까지 윌헬름에게는 남과 같은 존재다. 호텔 청구서를 처리할 능력이 더이상 없는 아들을 애써 모른척하는 애들러 박사는 윌헬름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아내 마거릿은 장거리 전화로 빚독촉하듯 그를 볶는다.
윌헬름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돈을 넘어선 따뜻한 말 한마디, 관심과 자비인데 야속하게도 자신의 영광과 명성유지에만 관심이 있는 아버지는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무관심과 의사로서 환자에게 해줄수 있는 차원 정도의 충고다. "템킨 박사는 사기꾼이 틀림없어. 의사를 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일거야. 그런 자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라." 하지만 템킨 박사는 애들러 박사가 해줄 수 없는 것을 준다. 그는 윌헬름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꺼이 건넨다. 그런 템킨 박사인데 그 누구보다 마음이 시린 윌헬름이 그를 거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이 결국엔 사기꾼 템킨 박사에게 넘어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전재산 700달러를 날렸다해도, 그런 윌헬름을 어리석고 바보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솔 벨로 [Saul Bellow, 1915.6.10~2005.4.5]
스웨덴 한림원이 1976년 솔 벨로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그의 대표작 '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를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으로 극찬했다. '오늘을 잡아라'가 1956년에 발표된 점을 생각하면 20년을 묵히면서 고전의 반열로 올려놓으려 그랬나 싶기도 하다. 윌헬름은 50여년 전이나 요즘이나 세상에 널리고 널린 소외된 중년 남성일 뿐이다. 젊은 시절 생각없이 벌여놓은 여러 것들-아내, 자식, 진짜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력들-을 뒤치닥거리 하면서 인생의 후반부를 살아가는 중년 남자, 인생은 고생스러운 것이 진짜라고 위로하며 고생에서조차 벗어나볼 생각도 하지 못하는 중년 남자, 사회에서 그리고 가정에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쓸쓸한 영혼을 가진 중년 남자들. 솔 벨로는 윌헬름의 하루를 스케치하면서 이 전형적인 인간상의 고뇌를 표현한다.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는 '소외된' 인간의 심리를 깔끔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고전의 반열에 올라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소외된 자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언제나 이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에는 소외계층이 포함되어 왔으며 요즘처럼 더 거대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사회가 문제를 직시하면서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소외라는 문제가 사회적 문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심리적 영향에 좌우되는 것이며 또 소외가 전인간적인 감정 중 하나라서 없애기 힘들기 때문은 아닐까. 어느새 소외는 '고생스러운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고생에서 벗어나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은 두려움'과 같은 위상을 차지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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