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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THE ROAD>- 종말 후의 이야기

gowooni1 2010. 1. 5. 18:49

<이 영화 리뷰는 Daum 무비로거 리뷰 포스트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죽어버린 나무, 뒤집어진 땅, 얼어가는 날씨, 비내리는 잿빛 하늘. 흑백에 가까운 영상 속에서 암흑적 분위기로 시작되는 <더 로드>는 더이상의 희망이 존재할수 없는 현실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지구가 멸망해버렸고, 모든 생명체가 죽어버렸는지 알수 없다. 다만 영화는 모든게 끝난 상태를 묵묵히 보여줄뿐이다. 나아질 것이 없어보이는 상태에서 시작한 영화는 과연 무엇을 말하기 위해 그리고 어떻게 종결을 지을 셈인지 씁쓸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남자와 아들은 여행을 한다. 목적없이 무작정 남쪽으로 향하는 여행의 계기는 아들의 엄마(샤를리즈 테론)가 남긴 목소리 때문이다. 한곳에만 머물면 잡아먹히든 굶어죽든 끝이나게 되어있고, 점점 추워지는 날씨는 그들 부자父子를 남쪽으로 내몬다. 남쪽으로 가면 정말 따뜻하고 살만한 세상이 나올지 알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가슴속에 불씨를 간직한 사람들'이라는 조촐한 긍지를 갖고 끝없이 길을 떠난다.

 

 

선과 악을 구분지을수 없는 종말 상태. 거기서 부자가 선택한 '선'은 '가슴속에 불씨를 간직한 사람들'을 말하고, 또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길을 떠나는 중에 살아남은 사람무리들을 만나면 무조건 숨어야 한다. 동식물이 하나도 남지 않은 지구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방식은 두가지-굶어가거나 사람을 잡아먹거나-일 뿐이므로 잡혀먹히지 않으려면 사람과 마주쳐서는 안된다.

 

 

부자는 여행자들이므로 모든 사건을 스친다. 스치는 모든 사건들에는 의미가 있지만 그 의미는 모두 깊거나 아니면 전혀 깊지 않거나. 마주하는 사건, 장소, 사람들에는 짧은 시간일지라도 압축된 과거가 보여진다. 제법 깔끔한 외관의 2층 저택 지하에는 갱들이 한명씩 꺼내어 잡아먹는 사람 창고가 있다. 그들은 사람의 육신을 했을 뿐인 가축과 같은 신세다. "우리를 살려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잡혀먹힐거예요." 그들과 같은 종족이기에 느낄수밖에 없는 공포심은 전반부에서 관객을 사로잡고 영화가 끝날때까지 지배한다. 부자가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관객은 이렇게 바라본다. "과연 저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들일까?"

 

 

미이라가 된 집주인의 방공호에서 발견한 엄청난 통조림은 먹을 것이 생존기간의 연장을 좌우하는 부자들에게 햇살처럼 다가오고 그들은 모처럼 인간다운 시간을 즐긴다. 배부르게 먹고 깨끗하게 목욕을 한다. 남자는 면도를 하고 잭다니엘을 마시며 담배까지 즐긴다.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과분한 행복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들 부자의 짧은 행복을 지켜보는 내내 관객은 마음 한 구석으로 공포심을 놓을수 없다. 그들의 행복은 매우 일시적일 뿐이며 음식이 떨어지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쫓기든 둘중 하나의 상황이 다가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잠깐의 행복은 슬프고 무섭기까지 하다.

 

 

자신들은 선이라고 믿어왔던 부자들에게도 선과 악이 갈리게 된다. 남자는 아들에게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악을 택하지만 어리기만 한 아들은 선을 고집한다. 길가다 만난 아흔살의 노인에게 음식을 건네주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아들이다. 자신들을 강도질한 흑인을 다시 강도질하는 것은 아버지다. 그 흑인에게 빼앗은 옷가지에 식량까지 덤으로 주는 것은 아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에서 아버지의 악과 아들의 선을 모두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런 상황에 처했을때 우리가 취할 행동은 아버지쪽이 될지 아들쪽이 될지 고민하게 된다.

 

 

처음부터 결말이 훤히 보였던 영화의 끝부분에서 아버지는 결국 죽고 아들만 살아남는다. 개연성없이 등장하는 한 생존가족들이 아들을 거두어들이고 '가슴에 불씨를 지닌 착한 사람'이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서 아직은 그래도 희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이 '다행이다'라며 가슴을 쓸어내릴수는 없다. 그 희망은 일시적일뿐이며 생존자들은 또 다른 고통스런 상황에 맞부딪히며 싸워야 하므로. <더 로드>가 가슴 한켠에 무겁게 자리잡고 전두엽속에 진한 잔상을 남기는 이유는 영화속 상황에 닥쳤을때 나라면 어떤식으로 생존해나가야 할지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영화속 부자父子가 보여준 진한 인간적 부성애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로드>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은, 어이없게도, 소시민적 일상생활의 즐거움을 누릴수 있는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과, 내가 중심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음에 안도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가슴속 깊숙이 숨어있었던,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갈망하는 너무나 소탈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