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피안 지날 때까지

gowooni1 2009. 12. 28. 12:29

 

 

 

피안 지날 때까지

저자 나쓰메 소세키  역자 심정명  원저자 夏目漱石  
출판사 예옥   발간일 2009.09.15
책소개 『피안 지날 때까지』는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새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대화를 통...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유달리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그 특징은 여자가 아닌 남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그건 '방관자'적 입장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아마 소세키 본인의 성격이 상당히 반영되었을터인데 그들은 보통 방관자도 아니고 <고등 유민>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고등 유민이라는 말은 소세키가 만든 신조어로써 대학을 졸업하고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적당한 재산이 있는 덕분에 굳이 구직활동을 하지도 않고 세상에 참여하지 않는 방관적 자세를 취하는 사람, 즉 듣기 쉽게 말하자면 돈 있는 한량을 말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후기 3부작 중 하나인 '피안 지날 때까지'에도 주인공을 게이타로를 비롯해 이러한 고등 유민이 여러명 등장한다.

 

이 작품은 병약한 소세키가 엄청난 피를 토하며 한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이때 즈음 그는 신체적으로도 많이 허약해져있던 터였고 덕분에 본격적으로 치밀한 구조의 장편소설을 쓰기에는 집중력에 무리가 있었을 때였다. 하지만 소세키의 소설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듯 일상적인 단편이 꾸준히 이어져 장편이 되는 특성도 있고, 또 사실 그 점이 자잘한 에피소드가 이어져 하나의 인생을 꾸려나가는 우리 인생을 그려보인다는 면이 매력이다. 인생을 사랑하지만 진짜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 인생을 여성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그녀를 사랑하고 질투하지만 경쟁하여 쟁취하려는 의지는 없는 사람으로서 그는 게이타로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보고 들었지만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던 인생을 담백하게 그려보이고 있다.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기 전 서문에서 보여주듯 그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어떤 큰 형식을 염두하고 썼다기보다는 일상적인 단편들을 엮어 장편으로 만들어 보려는 의도를 지니고 집필했다. 그래서 피안 지날때까지에서는 긴박감과 탄탄한 기승전결 구조 같은 현대 소설들이 판박이로 가지고 있는 그러한 구조에서 벗어나 초연함마저 느껴진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지만 아직 인생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는 게이타로가, 구직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겪는 간접 경험들이 전개된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로맨티스트인 게이타로는 수없이 읽은 탐정소설들 덕분에 그런 탐정의 역할을 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듯한 멋진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하지만 막상 그럴만한 배짱이나 용기도 없다. '학사'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가슴의 열정을 머리의 이성이 제어하는 이유도 있지만 게이타로는 결국 모험적 인생을 살아가거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서 만족을 느낀다.

 

소세키의 다른 소설 '마음'-후기 3부작 중 하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음'이 좀 더 전체적인 치밀한 얼개가 있다는 점이고, 비슷한 점이라면 초반엔 메이지 시대의 풍경이 눈에 보일듯한 묘사가 많고 후반으로 갈수록 인간 내면의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게이타로의 하숙집에서 알게 된 모모타로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취직을 위해 친구 스나가의 소개로 찾아간 다구치, 다구치로부터 의뢰를 받고 하룻동안 미행한 마쓰모토와 치요코의 이야기에서 소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인간관계를 다지고 당시 도쿄의 풍경을 묘사하여 배경까지 갖춘다. 다음에는 전형적인 고등 유민인 스나가와 마쓰모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주변인들과의 갈등, 그들 내부의 심리 변화를 묘사하면서 게이타로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결국 게이타로는 한 일가족의 삶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중심부까지 깊게 관여하는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입장이던 그는 그저 청각을 통한 삶을 살았을뿐 진짜 자신의 삶을 산 것은 아니었던 거다.

 

메이지 시대는 소세키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시대로서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한 지식인의 눈에 비친 메이지 시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변화하는 생각관, 그 시대 일본 여성의 강건함, 대학만 졸업하면 지식인 취급을 해주던 당시 풍조 등을 엿볼수 있다. 또 그 시대 바로 이웃에 위치하여 일본에 각종 이권을 침탈당하던 한국인 독자로서 보자면 침략국과 침탈국의 위치와는 별반 상관없이 그저 각자 한 소시민으로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참고로 '피안 지날때까지'라는 제목은 소세키가 피안彼岸이라는 절기가 지날때까지 연재를 하겠다고 생각하여 붙인 뜻없는 이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