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영화-MOVIE

백야행, 비뚤어진 그러나 한결같은..

gowooni1 2009. 11. 20. 12:58

 

14년전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폐선박에서 죽은 남자의 시체는 발기된 상태에서 경직된 채 발견되었고 발견된 장소는 완전하지 않은 밀실이었다. 밀실이긴 한데 완전하지 않았던. 그곳에는 어린 아이들이나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좁은 통로가 하나 있었을 뿐이다. 죽은 사람은 전당포를 경영하던 제법 부유한 자로 번듯한 가정을 가진 가장이었고 흠이 하나 있다면 내연관계의 여자가 한명 더 있었다는 것 정도다.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사건이었지만, 내연의 여자가 가스중독으로 자살을 하면서 보통의 치정관계에 의한 타살과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죽은 남자에게는 김요한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고, 죽은 여자에게는 이지아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우연찮게도 그들은 같은 학교의 같은 반에 있었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이후 둘 사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계가 성립되었고 여자애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그러던 중 여자애는 한 가정에 입양이 되고 이름과 성까지 바꾼다. 이지아에서 유미호라는 이름으로 바꾼 후 학교까지 옮기게 된 여자에는 요한과 거리를 둔채 각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한 약속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15년 동안 만나지 말기로 한 14년 전의 약속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공소시효 만기 기간이었다.

 

 

그리고 14년 전 그 사건 때문에 인생이 뒤바뀐 한 형사가 있었다. 아직 젊고 혈기왕성하며 패기가 넘치던 그는 그 사건이 그런 식으로 종결된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개인적으로 조사에 들어간다. 그가 봤을 때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내연의 여자가 남자를 죽여야 했던 이유도 부족했고, 설령 충분히 있었다 해도 밀실살인을 완성시키기엔 그녀의 체구가 컸다. 게다가 그녀의 자살 방식 역시 자살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형사는 폐선박에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가서 좁은 통로에 들여보낸다. 그가 알고 싶었던 건 단 하나다. 그 통로로 어린 아이들이 실제로 드나들 수 있느냐 하는 것 뿐. 그러나 아들은 그만 실수로 발을 헛디뎌 아래로 추락하고 결국은 죽고 만다. 자책감과 절망으로 그 형사 역시 수사에서 그만 손을 떼버리고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인생을 소비하고 만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09년. 공소시효 만료일인 2009년 12월 19일을 일년도 채 남기지 않고 또 하나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요한의 새 아버지로 출소한 지 얼마되지 않은 남자였으며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악질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살해당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가 요한과 미호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이유. 그는 결국 요한의 손에 죽고 말지만 죽기 전 손톱으로 그의 목을 긁으면서 물증을 하나 건졌다. 이 물증에 의심을 품은 혈기 왕성한 젊은 형사는 14년 전의 형사(한석규)를 떠오르게 한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아직 20대이며 겉멋 부리기 좋아해 선글라스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생각한다는 것 정도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요한에게 있어 자신들의 과거를 밝히려는 자들, 혹은 이미 알고 있는 자들, 또는 그것들을 이용해 미호와 자신의 아름답고 찬란하고 사랑으로 가득찰 미래를 훼방놓을 자들은 죽여야 할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신의 새아버지는 물론 선글라스를 쓴 젊은 형사도 요한에게는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없애버려야 할 사람이 또 한명 있었다.

 

 

미호라는 이름답게 여러 남자를 홀리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한 그녀는 한 돈 많은 유부남과의 결혼을 눈 앞에 두었다. 그러나 자신의 연인을 믿지 못하는 그는 여비서를 시켜 유미호의 뒷조사를 하고, 어느 누구보다 사장을 사랑하는 여비서는 넘치는 사명감으로 유미호의 흠을 잡는데 온 정열을 쏟는다. 사랑하는 남자의 결혼을 반드시 막아야 하는 한 여성으로서 그녀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만, 그 질투심을 바탕으로 한 과도한 조사 때문에 요한과 미호의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자신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친아버지를 죽인 요한과 친엄마를 죽인 미호. 그들은 처음부터 비뚤어진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행복한 미래를 위해 비뚤어진 길을 계속 나아갔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비뚤어진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요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범행을 시주한 사람은 미호였지만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요한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미호와 요한은 대낮에도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는 불쌍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연인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공소시효 만기일이던 2009년 12월 19일,  미호는 자신의 브랜드 M&Y 옴므 론칭 행사를 열게 되고 소감을 한 마디 한다. 자신은 오늘을 위해 살아왔으며 언제나 자신을 지켜봐주던 '그분'께 감사한다고.

 


행사가 완료되고 디너 파티 중 천장의 유리를 깨고 왼쪽 가슴에 가위를 꽂힌 채 떨어져 죽어가고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요한이었다. 이제 이 세상에 미호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한형사(한석규)와 자신밖에 없었으므로, 그 둘만 죽으면 미호의 인생은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죽어가고 있던 요한을 보며 눈물을 떨어뜨린 채 한형사는 미호에게 말한다. '일평생 너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애야. 모르겠니?' 하마터면 요한에게 다가가려고 한 미호의 손길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앞으로 자신의 딸이 될 여자애였다. 정신을 차린 미호는 죽어가고는 있지만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요한의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한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눈길을 거두지 않은 요한(고수)의 곁을 그대로 지나 위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죽어가면서 마지막까지 미호를 바라보는 요한의 웃는 얼굴이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요한이라는 인물의 기구한 인생이 관객의 동정을 자아낸다. 하지만 마지막에 미호가 자신에게 달려와 울고불며 매달려주길 원했을까? 오히려 그러면 그동안 자신이 미호를 위해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지는 않았을까. 매정하긴 했지만,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던 미호의 말이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지 않았을까. 요한을 부정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감으로서 미호는 요한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랬기 때문에 요한은 마지막까지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