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영화-MOVIE

레볼루셔너리 로드-케이트 윈슬렛과 디카프리오의 10년 만의 재회

gowooni1 2009. 4. 3. 19:14

 타이타닉 이후 10년 만에 재회한 커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레볼루셔너리 로드]. 케이트 윈슬렛의 인터뷰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직접적으로 말해서 저예산 영화다. 큰 스케일도 없고 변화무쌍한 배경도 없다. 오로지 인물간의 갈등만으로 진행되는 영화이므로, 온전히 배우의 역량에 달렸다. 케이트 역시 타이타닉 이외에는 스펙터클한 영화보다 진정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만을 고집해왔고, 레볼루셔너리 로드 역시 그런 영화다. 그런 영화답게 연기파 배우 두명이 주연을 맡았다. 글쎄, 저예산 영화라고는 하지만 케이트와 디카프리오 두명 섭외하는 시점에서 이미 저예산 영화라고 하긴 좀 모순이지 않을까.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혁명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 이는 단지 맨해튼에서 기차로 한시간 넘게 걸리는 교외에 사는 두 주인공의 집이 있는 길 이름이다. 때는 1955년 7월, 둘은 어느 술집(이라고 해야 하나 무도회장이라 해야하나)에서 만나 첫눈에 이끌리고 결혼하여 딸 아이 두명을 낳고 살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렇게 정착해버린 현실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에이프릴(케이트)은 배우가 되고 싶어 하고, 프랭크(디카프리오)는 야심은 있지만 그저 착실한 남편이자 아빠로서 인생을 보내야 하는게 그리 달갑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둘의 사랑하는 마음이 변한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은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각자의 꿈을 접은채 서로에게, 그리고 현실에 맞춰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위태롭게.

 그러나 하루 둘은 크게 싸운다. 아내에게 별 인사도 없이 출근한 프랭크는 그날 당장 오입을 하고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 날은 프랭크의 서른번째 생일. 하루종일 남편 걱정을 한 에이프릴은 다른 여자와 자고 들어온 남편을 위해 꽃단장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를 열어준다. 그뿐이 아니라, 깜짝 제안까지 한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지 말고, 자신이 돈을 벌테니 파리로 이민 가서 한번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고 말이다. 그렇게 한 가족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휩싸인 행복한 나날 시작된다.

 에이프릴은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보다 곧 굶어 죽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꿈을 쫓는 여자다. 그녀가 나중에 파리로의 이민이 좌절되고 절망에 휩싸여 한 말은

'사는 것 처럼 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요.

 결국 난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에요.'

라고 한 말은 그녀가 지닌 삶에 대한 자세와 그것이 좌초됨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느끼는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

 파리로의 이민을 꿈꾸며 행복하게 1955년 7월의 여름을 보내는 두 사람. 다른 사람이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만 행복하다면 아무 상관도 없다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만약 우리가 사는 방식을 남들이 미쳤다고 한다면, 차라리 미치는 쪽을 택하겠어요.'

이 대사 역시 에이프릴이 어떤 여성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꿈같은 나날을 보내며 미래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고, 어차피 회사를 그만 둘 프랭크는 이제 위에서 내려오는 보고서에 대한 압박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써 보낸 '공정개선'에 관한 보고서는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즉석에서 '갈겨' 낸 날림 보고서다.

 그러나 인생은 생각보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다. 프랭크가 제출한 날림 보고서는 그가 근무하고 있는 '존 녹스 사무기기'사 사장의 눈에 띌 정도로 획기적이어서 사장이 몸소 프랭크를 위해 사무실에 얼굴을 내민다.사장은 획기적인 승진제안을 하고 물론 프랭크도 처음에는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 사이 파리로 이민 갈 준비를 하는 에이프릴. 한껏 들떠서 프랑스 이민국에 다녀오는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눈부심은 곧 꺼지기 직전 더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같아서 더욱 가슴이 시리게 예쁘다.

 한편, 반복되는 사장의 승진 제안에 그만 '현실 안주'로 마음이 굳어진 프랭크는 마침 셋째를 임신한 에이프릴에게 그냥 이대로 살자고 설득하고, 아이를 지우고라도 파리로 갈 마음을 한 에이프릴은 그런 남편에게 거리감을 느낀채 둘의 사이가 악화된다. 에이프릴은 자신들이 꿈꿨던 미래를 한낮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남편에게 실망하고, 셋째를 지울까 말까 하고 고민 하는 중 위태로운 나날들이 지나간다.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을수록 프랭크는 자꾸 사무실 여직원하고 관계를 갖는다.

한편, 부동산 에이전트 여자의 아들인 정신나간 남자. 이 사람은 에이프릴의 임신이 파리 이민의 걸림돌이 되는 게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따지고 든다. 그는 결국 현실에 꼬리를 내리는 프랭크에게 (정신나간 남자답게) 극도의 비난을 퍼붓고, 에이프릴에게도 심한 말 한마디를 남긴채 떠난다.

"적어도 내가 그 뱃속의 아이는 아이라는 것이 다행이오!"

 정신나간 남자의 엄마. 처음에는 프랭크 부부를 '교양있고 배울 것이 많은 부부'라고 칭송하다가도 (전적으로 자신의 아들 때문에 틀어진 사이 인데도)사이가 한번 틀어지자 무조건적으로 아들을 감싸고 돌면서 프랭크 부부의 험담을 일삼는다. 일종의 '남 잘되는 꼴 못보고 남 못되는 꼴 보면 좋아서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소인배'이자 일반인의 모습을 아주 잘 나타내는 인물이다. (즉, 이 영화 최고 진상.) 

 한창의 격돌 끝에 프랭크는 아내와의 화해를 시도하고, 에이프릴도 일단은 받아들이는 것 같다. 불안한 마음으로 출근하는 프랭크는, 그래도 자신을 아내가 용서해주었다는 사실로 믿고만 있었다.

 글쎄, 그러나 그녀는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를 한 셈이다. 그녀가 3개월이나 된 아이를 혼자 낙태하다가 결국 출혈과다로 죽고 말지만, 프랭크의 출근모습을 보는 것을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바라보는 저 표정에서는 이미 에이프릴 혼자서라도 꿈을 찾기 위해 집과 가족을 떠나보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최후의 만찬을 대접해주고, 친구에게 맡긴 아이들에게 안부전화를 한 뒤 홀로 집에서 낙태를 감행한다. 지금의 의학이라면 임신 12주차 아이를 낙태한다 해도 목숨까지 지장이 있지는 않겠지만, 1955년이었고 임시적인 기구를 이용했으니 목숨을 잃었다.

 

꿈을 찾기 위한 인생을 원했을 뿐이지만 이도 저도 안된 에이프릴의 모습은 그때에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갈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실 안주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위협적이다. 꿈 없는 사람들에게야 우울한 영화라는 평으로 끝날수 있지만 꿈이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자극적이다. 그들은 '왜 현실에 안주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모독하는 거냐'고 반응할 것이다. 어떤 인생이 옳은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가족과 안락함을 위해 꿈을 꿈으로만 남기며 현실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과, 그 모든 것보다 꿈을 더 소중히 여겨 그것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꿈을 추구하다 이루지 못하고 현실의 안락함까지 얻을 수 없는 사람들 이 세가지 모습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각자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다르니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한때 에이프릴같은 사람이 되어 항상 꿈과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낀채 '사는것 같지 않은 인생'을 살 뻔했던 위험에서 벗어난 사람으로서 에이프릴을 위해 한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또 한가지. 1955년의 미국이나 21세기의 한국이나 사람 사는 모습이 변한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서 참 씁쓸했더랬다. 맨해튼 근교에서 열차 시간에 맞춰 출근, 1시간 걸려 뉴욕 중심부 일터에 도착, 퇴근하면 다시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지금 서울과 수도권 지방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과 별 반 다를 바 없으며, 회사에서의 승진제안이 남자 또는 여자에게 미래의 행복에 부풀었던 삶을 내팽개치고 눈앞의 야망을 불태우는 촉진제가 된다는 것도 비슷했다.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사랑했던 것중 단 한가지 잘못은 꿈을 더 우선시 하는지 현실을 더 우선시 하는지 서로의 가치관을 미리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상대의 가치관을 먼저 따져가며 사랑에 빠지겠는가. 그것 역시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수는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결과가 나왔으니 이런, 다시 모순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