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랜도
|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올랜도는 남자였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귀족들이 서로 사귀고 싶어할만큼의 명문가였던 그는 수천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이었고, 남성이었고, 미혼이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기품, 긴 다리, 아름다운 얼굴의 올랜도는 다른 여인에게 키스를 하는 것만으로도 여왕의 질투를 살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 실제로 그가 많은 여성들과의 풍문을 뿌리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이상할터였다. 실제로 그는 많은 여성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곤 했지만 한번도 질투에 사로잡힐만큼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겨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도 봄날은 왔다. 올랜도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아버린 여자는 남성적 호방함과 요부의 매혹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던 러시아 여인 사샤였다. 드디어 올랜도를 한번에 휘어잡을 수 있는 여자가 나타난 것이는데 실제로 올랜도는 그녀와 함께라면 세상 어느 곳으로든 도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일방적이어서는 행복하지 않다. 사샤는 올랜도가 그녀를 좋아하는만큼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둘이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달없는 밤의 12시에 올랜도의 믿음을 저버렸다. 올랜도는 사랑에 버림받았고 사샤는 고국 러시아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올랜도는 모든 사교생활을 끊고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시를 사랑하며 자신의 시고 '떡갈나무' 작업을 계속하였다. 여기서 그가 또 다른 여성들을 만나고 지겨워하고 도망가다시피 콘스탄티노플에 대사로서 지원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올랜도'에서 중요한 건 올랜도란 사람의 성 정체성과 시간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시대의 변화, 시간을 마치 비껴가는 듯 한 올랜도의 의식의 흐름이 더 중요하다.
영국 대사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성대한 파티를 열던 날 그는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하인들이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듯한 소음이 들려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런식으로 거의 혼수상태와 같은 잠을 일주일이 넘게 자고 일어난 올랜도의 신변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삼십대 초반의 멋진 남성 올랜도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여자 올랜도. 그래서 그는 이제 그녀가 되었다. 그녀는 남성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름답고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타 남성을 매혹하는 매끈한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날씬한 몸매를 소유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한때 남성이었던 그가 기억을 전혀 잃지 않고 여성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이는 작품의 판타지성을 더해줌과 동시에 올랜도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어째서 선구적 페미니스트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올랜도는 남성이기도 한 여성이다. 속은 남성이지만 여성이라는 육체를 가짐으로서 자신이 남성이었을 때 이해할 수 없었던 여성의 심리를 보다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귀족적이고 자연과 시를 사랑하며 자신만의 고독한 세계에 빠지길 즐겨했지만 남성으로서의 명예욕같은 것은 없어졌다. 평소 허리춤에 있던 칼을 쉬이 뽑을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손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숄을 부드럽게 감싸는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작품의 전체에 흐르는 시간도 모호한데, 분명 엘리자베스 시대(16세기)에 태어난 올랜도는 19세기가 지나고 20세기초반이 되도록 겨우 여섯살을 더 먹었을 뿐이다. 거의 300년 아니 400년에 가까울만큼 시대의 흐름은 지나가고 있는데 올랜도의 의식에 흐르는 시간은 고작 6년이다.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올랜도와 같은 시간의 흐름 속을 사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인물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오래 등장한다. 15세기에 만났던 사람을 19세기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녀를 보살펴주던 유모들은 벌써 몇명이나 바뀌었다. 보통 사람들은 보통의 시간을 살고, 중요한 사람들은 자기 의식 속의 시간을 산다. 마치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이 수십년을 사는 동안 생각이 없는 동물들이 세대를 열심히 바꾸며 존속하려는 생물학적 노력으로 십수년의 수명을 누리는 것을 비유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자중독-Reading > 문학*문사철3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에 달이 두개 떠 있는 세계-1Q84 (0) | 2009.11.26 |
---|---|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0) | 2009.11.17 |
가족 화목의 허상-다섯째 아이 (0) | 2009.11.06 |
시간 여행자의 아내(The Time Traveler's Wife) (0) | 2009.10.21 |
회색 노트 (0) | 2009.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