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한다는 뜻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함축된 전제가 하나 있다. 그건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바꾼다는 전제이며, 충분한 시간을 들인 공간의 이동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우리의 삼차원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 중, 우리가 기꺼이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건 그나마 공간이다. 사람들은 공간을 여행하지 결코 시간을 여행하지는 않으며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저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오드리 니페네거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상상력과 각종 장치를 동원하여 시간 여행자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2009년에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그냥 잊혀질 뻔한 책이 다시 발간되는 사건이 생겼다(사실 이런 일은 부지기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 판본에는 과거 시제로 고쳐서 번역되었던 '헨리의 현재'가 현재 시제로 원작에 충실하여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헨리의 현재를 현재 시제로 고쳐서 번역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 여행자인 헨리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60년대든, 70년대든, 2000년대든 헨리가 떨어진 시대는 그에게 있어 언제나 현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60년대에 떨어진 삼십대의 헨리가 다섯살짜리 자기 자신과 만난다고 해도 그것은 삼십대의 헨리가 겪고 있는 오늘이고 현재이니 말이다.
에릭 바나&레이첼 맥아담스 주연으로 제작된
[시간 여행자의 아내]
다른 소설들이 공간을 신나게 넘나든다면, 이 소설은 시간까지 신나게 넘나들기 때문에 처음에는 약간 헷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읽다보면 저자가 기본적으로 깔아놓은 배경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지기 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한데, 이제 막 그 소설의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느긋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슬슬 사건이 터지기 시작한다. 시간을 조작하여 저자가 여기저기 깔아놓은 복선들 때문에 독자의 머릿속에 엔트로피는 점점 높아진다. 대체 이 사건이 왜 발생하였으며 이건 나중에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되는 건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그리고 복잡한 사건들의 전후에서 작가가 튼튼하게 만들어놓은 소설의 구조에 조금씩 감탄하기 시작한다.
어린 클레어와 다 큰(?) 헨리
기본적으로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시간 여행자인 헨리와 그의 아내인 클레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다. 현실 세계에서 헨리와 클레어는 고작 8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사이지만 사실 클레어에게 있어 헨리는 평생을 함께 하는 운명적 사랑이다. 시간 여행을 하는 헨리가 삼십대에 벌거벗은 몸으로 여섯살짜리 어린 클레어에게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둘의 만남은 시작된다.
헨리는 시간 여행에는 법칙이 있는데 그건 자신의 몸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이동할 수 없고(심지어 치아의 보철물까지도) 언제 어느 시대에 떨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시간이 이동되어 있고 벌거벗은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에 헨리에게 있어 자신의 특수성은 이만 저만 골치 아픈게 아니다. 한겨울에 벌거벗은 채로 도로 한가운데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도심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다. 헨리는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걸 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헨리는 그리하여 도둑질, 소매치기, 문 따는 법 등을 배우게 되는데 그걸 가르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래에서 온 자기 자신이다.
헨리의 시간 여행은 일관성이 전혀 없이 뒤죽박죽이다. 그래서 6살의 클레어가 33살의 헨리를 만났으면, 8살의 클레어가 30살의 헨리를 만날 수도 있다. 유년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헨리는 클레어의 인생에 꾸준히 나타나며, 클레어의 마음에 사랑을 싹트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헨리는 클레어에게 '미래의 너는 내 아내'라고 미리 귀뜸을 주는데다가 헨리는 도서관 사서로서 아는 것도 많고 매력적이며 잘 생긴 성인 남자란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둘은 추억을 만들고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클레어에게 헨리가 말한다. 앞으로 2년간 나는 너를 만나지 못할 것이며 2년 후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나는 너를 모를 것이다. 미래에서 온 헨리는 자신이 클레어를 만난 처음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정말 2년 후엔 클레어 20살에, 그녀는 드디어 28살의 헨리를, 자신이 봤던 헨리 중 가장 젊지만 정말 자신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헨리를 뉴베리 도서관에서 만나게 된다.
시간 여행자인 헨리와의 결혼 생활이 평범할 수는 없다. 클레어는 평생 헨리를 기다리는 마음 가짐으로 산다. 어릴 때는 불쑥 나타나는 헨리를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고, 결혼하고 나서는 과거의 자신과 추억을 만들어주고 돌아오는 헨리를 기다린다. 헨리에 대한 클레어의 기다림은 시간 여행 때문에 헨리가 죽고 난 다음에도 계속된다. 가끔이고 잠깐이긴 하지만 미래를 여행할 수도 있었던 헨리이기 때문에 살아 가는 도중 언제 자기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죽은 남편을, 클레어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43세에 헨리가 죽고 나서도 35살의 클레어는 82살까지 주욱 남편을 기다린다. 그렇게 평생 한 남자만을 기다리며 살아온 클레어는 묵묵히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헨리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막바지인 82살에, 조용한 방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42살의 헨리를 '드디어' 만나게 되며, 그 순간 모든 독자들에게 시간 여행을 통한 러브 스토리의 감동을 선사한다. 아마 이 순간을 위해 시간 여행이라는 복잡한 장치를 고안해 낸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삽입한 영화 스틸 컷과 원작의 내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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