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가족 화목의 허상-다섯째 아이

gowooni1 2009. 11. 6. 17:30

 

 

 

다섯째 아이(세계문학전집 27)

저자 도리스 레싱  역자 정덕애  원저자 Lessing, Doris  
출판사 민음사   발간일 1999.06.25
책소개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 소설! 영국 출신 여류작가이자 2007년 노벨문학상 ...

 

때는 1960년대, 전후의 상처도 어느정도 아물고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기 시작한다. 미혼의 남녀들은 혼전 성관계를 마음껏 즐기며 되려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문란한 성관계는 오락 그 이상 이하의 것도 아니고 마약과 혼외정사, 이혼 같은 '한때는' 부덕했던 덕목들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여기에 옛방식을 고수하는 두 남녀가 만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들은 문란한 성관계나 이혼따위는 꿈도 꾸지 않으며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만이 인생 최대의 목표다. 직장 파티에서 만난 그들은 한눈에 자신들이 천생연분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약속한다. 인생 목표가 같은 이성을 만나는 것처럼 신나고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그들의 인생 목표는 단 하나다. 궁궐같은 큰 집을 사고, 그 방을 전부 사용할 수 있을만큼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을 낳고, 휴가철에는 자신들의 일가 친척들을 전부 불러 모아 파티를 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드는 것.

 

하지만 그들의 소소한 바람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그들이 그 '호텔같은' 큰 집과 한 다스 정도 낳을 예정인 아이들을 키우기에 수입이 넉넉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데이비드의 친아버지가 가진 재산으로 충당을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부부의 꿈은 확실히 분에 맞지 않았다. 엄청나게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우며 파티를 하고 손님들의 음식을 충당하는 꿈은 영국 전통 귀족들이나 일상생활로 영위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보통의 월급쟁이였던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소득으로는 사치였다. 더군다나 해리엇이 곧장 첫째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수입은 데이비드의 월급으로 고정되고 말았다.

 

엄청나게 많은 아이를 낳아 알콩달콩하게 살겠다는 그들 부부의 꿈은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네번째 아이까지는. 6년 만에 4명의 아이를 낳은 해리엇은 지쳐서 다소 날카로워졌고 해리엇의 친모 도로시는 이제 화를 낸다. 분에 맞지도 않는 생활을 끝까지 고집하는 딸 부부의 모습에서, 자신은 평생 딸자식의 하인이나 하다 죽게 될거라며 아이를 그만 낳으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해리엇은 지나친 출산으로 인해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고, 휴가를 맞아 자신의 집에 놀러온 손님들에게 신경질을 감추지 못하는 히스테릭 기질을 보이고 만다. 그런 모든 정황들이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엄청나게 많은 자식을 낳을 계획'을 꺾지는 못한다. 그들은 반드시 많은 아이들을 낳아 자신들의 왕국을 완성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도로시의 말이 먹힌 부분은 '다섯째 아이는 조금 기간을 둔 후에 낳아야겠다'는 그들 부부의 결심이었다.

 

하지만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들어선 다섯째 아이는 임신기간부터 그들 가족의 일상을 조금씩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원하지도 않던 임신자체가 먼저 그들을 괴롭혔고, 임신중 내내 발길질로 해리엇을 고통스럽게 하는 태아는 앞으로 시작될 전쟁의 예고편이었다. 이전 4명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너무도 자신을 아프게 하는 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해리엇은 약을 자주 먹어야했는데, 시간이 지나 약기운이 떨어진 태아는 마치 복수를 하듯 해리엇을 더욱 괴롭혔다. 기나긴 고통의 9개월이 지나고 나온 다섯째 아이는 10달을 다 채운 아이보다도 기운차고 우량했다.

 

다섯째 아이는 그들 부부의 유전자를 빌어 나온 괴물이었다. 엄청난 힘, 엄청난 식욕, 괴성을 무기로 다섯째 아이는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몇년에 걸쳐 이룩한 왕국을 차츰 무너뜨린다. 사건은 친척 중 한 명이 데려온 개가 목졸려 죽은 채로 발견되는 걸로 전개된다. 범인은 다름 아닌 한 두살 정도 밖에 안 된 다섯째 아이 벤이었고 벤은 그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나 반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제 친척들은 휴가철에 그들의 집에 오기를 꺼려하고 데이비드는 이 비정상적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선언하며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문제는 벤이냐, 아니면 나머지 4명의 아이들과 그동안 자신들이 이룩해놓은 세계를 지키느냐의 문제로 갈리는 일이었다. (이후가 궁금한 사람은 직접 책을 읽어보시길)

 

도리스 레싱은 이 작품을 두가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구상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빙하기 시대 인류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원시적 유전자가 있다는 기사와, 4번째 아이 때문에 가족의 화목이 파괴되었다는 한 평범한 가족의 기사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벤은 데이비드의 말처럼 그들 부부의 착한 자식이 아니라 인류 조상의 원시적 유전자가 발현된 일종의 돌연변이같은 아이였던 셈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런 괴물같은 벤이 태어났고, 그로인해 그들 부부의 왕국을 파괴해야만 했을까?

 

레싱은 답을 내리지 않는다.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도 독자로서는 그리 쉽게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을 살짝 연관시켜 추측을 해보면 이 정도의 결론은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도리스 레싱은 스물살 전후에 결혼을 했지만 자신이 '안락하고 평온한 가정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스물다섯 전에 이혼을 한다. 그 외에도 평탄하다고만 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 모든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행복과 화목이란 것이 실은 허상이고 위선이며 아주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지는 불완전한 꿈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다섯째 아이로 인해 무너지는 한 가족의 행복이 아주 상세하고도 긴박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가지 의문. 과연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이상적 왕국은 영원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