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한 게 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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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만 해도 일상을 함께 했던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당신이 사랑한 게 나였을까'는 이런 상황 설정으로 시작한다. 사라진 안젤라는 죽은 것도 아니고 흔적도 없이 도망가 버리지도 않았다.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유로 3년간 사랑한 남편에게 이별의 메모를 남기고 안젤라는 떠나지만, 그녀는 단순히 남편을 떠나버린데서 그치지 않고 안젤라로서 살아온 3년간의 인격 자체를 통째로 버린다. 그러니까 남편이 찾아와서 '이제 함께 돌아갑시다, 내가 잘못했소'라고 말한다 해도 안젤라는 '전 더 이상 안젤라라는 여자가 아니에요. 지금은 가브리엘라라는 전혀 다른 여자가 되어버렸는걸요.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은 애초에 3년짜리 인격이었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도 변하는데 하물며 사랑이 변하지 않을 수야. 아니, 사람이 변하지 않아도 변하는 게 사랑이다. 애초에 사람과 사랑이 변하는 데에는 어떤 논리적 이치을 적용시킬 수 없다. 연인이 서로 발전하는 모양새로 변해서 사랑도 더 업그레이드 되고 굳건해진다면 그야말로 해피엔딩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무시하기 힘들다. 하지만 어제보다 그를 조금 덜 사랑하거나 혹은 더 증오할 수는 있어도, 그를 사랑하던 내 안의 나를 완전히 없애버린 채 전혀 다른 인격을 연기하며 사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궁금하다. 모레나가 남편 클라우디오 앞에서 연기한 3년간의 안젤라라는 인격은 진짜 자신인 모레나를 감추는 데 완벽한 가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클라우디오는 안젤라가 떠나고 나서야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 하다 못해 자신을 만나기 전에 살던 곳이 어딘지, 태어난 곳이 어딘지조차 몰랐음을 깨닫게 된다.
모레나가 진짜 자신을 숨기고 안젤라로서 살아가게 된 이유 역시 남자였다. 자기 아버지의 제자이자 전도유망한 작곡가 겸 지휘자 조르조. 하지만 조르조는 모레나에게 진짜 사랑과는 맺어질 수 없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상처를 안겼다. 모레나가 조르조와 사랑을 나누던 진짜 자신인 모레나라는 인격을 버리고 안젤라로 살면서, 그녀는 사랑으로부터, 진짜 인생으로부터 도망을 쳤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클라우디오를 떠났다. 더 이상 모레나로도 안젤라로도 돌아갈 수 없는 그녀는 이제 평범한 대중이 되어 평범한 인생을 즐기고자 가브리엘라라는 인격으로 변장하고 아무 생각없는 척 즐거운 척 살아가기로 한다.
모레나라는 인물은 매력적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반대로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매력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인 척 연기를 한다. 가브리엘라로서. 그러나 낭중지추였다. 가브리엘라로 옆집 사람들과 평범하게 친구하며 소시민의 삶을 영위하려던 그녀는 자신의 범상치 않은 매력을 숨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주변 남자들을 끌어 당기고 주변 여성들에게서는 경계받는 위치에 어쩔수 없이 다시 한 번 또 오른다. 그녀는 여성에게조차 애증의 대상이다. 매력적이어서 친해지고 싶고 다가가고 싶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한 매력 때문에 질투심을 동시에 받는 그런 사람이 바로 그녀인 것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썼던 시나리오 작가 빈첸초 체라미는 오랜 시간 희곡과 시나리오 창작을 하다가 8년만인 2001년 드디어 '당신이 사랑한 게 나였을까'로 본업인 소설가의 위치에 돌아온다. 소나타의 악장 형식을 빌려 총 4악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그저 술술 읽히는 소설과는 달리 문학을 예술로 만들어 보고자 한 작가의 노련함이 단연 돋보인다. 소설의 재미와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가슴 아련한 만족감, 거기에 아름다운 한 편의 이탈리아 영화를 본 느낌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작품이며 어설픈 작가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장의 기운까지 감도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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