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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참신함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참신함의 정도가 기존과 비교했을때 꽤 파격적이라면 타성에 젖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이단이라며 평가 절하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단적인 세계라도 타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굳건히 창조해나가면 언젠가 시간이 지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이단 세계를 재평가한다.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며 극찬을 하고 인정을 한다. 그러니 소설가나 화가 같은 예술가에게 있어서 세상의 이목에 초연할수 있는 마음가짐과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올릴수 있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능력은 성공의 여부를 떠나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평가하는데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 흔하다고 할 수 없는 레즈비언이나 근친상간, 자살 같은 파격적인 소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여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창조한 소설가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아무래도 요시모토 바나나다. 그런 소재를 사용한 사람이 그녀보다 더 많을수는 있겠지만 이를 대중적으로 읽히게끔 만든 사람을 인정하라면 단연 바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녀의 작품세계는 점점 더 널리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다. 그리고 나 역시 뒤늦게야 그녀의 세계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독자 중 한 명이다. 그녀가 그런 책을 고작 한 두권 내놓고 말았다면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다룬 작품을 인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을지는 의문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소설 속에서 자신의 세계와 비슷한 상황을 보고 싶어하고 그 상황 속에서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통쾌한 역전을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N.P를 다른 소설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세계가 뚜렷이 나타났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그녀가 즐겨 쓰는 소재가 제한된 등장인물 속에서 농축되어 이야기가 전개되어서다. 98편의 단편소설을 쓰고 자살한 소설가와 그의 아들 오토히코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부자父子가 한 여인을 사랑했다는게 그 공통점인데 그 여인의 이름은 스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이는 자살한 소설가의 친딸이자 오토히코에게는 이복 남매인 여성이다. 스이가 자신의 친딸임을 알고 괴로워하며 끝내 자살을 선택한 아버지처럼 오토히코 역시 자신들의 마지막 열쇠는 자살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한다.
오토히코에게 있어 스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지만 스이와 함께하는 한 둘 다 견딜 수가 없음은 자명하다. 오토히코의 친누나 사키는 이런 자신의 동생과 이복동생을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이복동생 스이는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을 빼앗아간 여성이란 점에서 더욱 친해질 수 없는 그런 존재다.
이런 관계의 과거들로 숨쉬기조차 힘든 분위기를 가진 그들이 어느 여름날, 너무도 자연스럽게 주인공 카자미의 세계에 침투해 들어온다. 자살한 소설가의 마지막 단편을 번역하다 자살한 남자친구 쇼지와 인연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족과 엮이게 되지만 카자미는 이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색하기는 커녕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편하다.
카자미라는 주인공은 오히려 저자의 작품 속에서 엑스트라 같은 주인공이다. 저자인 요시모토 바나나가 즐겨 다루는 소재와 직접적인 관련도 없고 지나치게 평범한 여자라서 스이나 오토히코 같은 등장인물에 비하면 들러리에 불과한 느낌이 드는 인물이다. 하지만 카자미는 분명 주인공이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스이나 오토히코, 사키 사이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녀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마지막 길인 자살에서 조금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평범하고 밝게 살던 외부인의 개입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극단적인 방법 외에는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하는 외골수들에게 평범한 삶을 선호하는 카자미의 등장은 한줄기 구원의 햇살이었던 거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설명하기 보다는 보여주는 작가다. 등장인물 개인의 심리를 시원스게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그냥 넘어가버린다. 대신 제한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상황이나 대화를 통해 독자들이 편한대로 마구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준다. 여지를 남겨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바나나는 조금 친절한 작가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으로 상상하고 싶은 독자에게든, 씁쓸한 결말로 마무리짓고 싶어하는 독자에게든 누구에게나 문을 조금씩 열어두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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