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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도 인생은 살만한 것-자기앞의 생, 에밀 아자르

gowooni1 2009. 7. 13. 22:16

 

 

 

자기앞의 생

저자 에밀 아자르  역자 용경식  
출판사 문학동네   발간일 2003.05.06
책소개 1980년 의문의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와 동일 인물인 에밀 아자르. 자살...

 

많은 사람들에게는 행복하면 불안해지는 병이 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건, 그런 사람들은 꼭 현재 없는 것만을 원하는 성격이라서 행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게 꼭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많은 이들의 삶의 목표지만 그것을 얻은 순간 불안해진다면 행복은 단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무언가를 원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 성격은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열정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토록 바라던 무언가를 손에 넣었을 때 느낄수 있는 행복감은 너무 미약하거나 무감동해서 되려 당황스러울때가 많다.

 

로맹 가리도 아마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나 싶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고도 결핍을 느끼는 병. 이미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으로 1956년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공쿠르 상을 수상하고, 편집장까지 지내며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그에게 굳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가 다른 일반인들처럼 자신이 쌓아올린 사회적 위치에 안주하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에게는 진정한 작가의 혼이 있었다.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년 5월 8일 ~ 1980년 12월 2일

 

그는 이름이나 기존의 명성에서 벗어나 그는 순수하게 작품만으로 평가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오촌의 신분을 빌려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네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그 중 '자기앞의 생'으로는 두번째 공쿠르 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 과연 그가 에밀 아자르가 아니라 로맹 가리라는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했으면 그런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면 이미 언론에서는 '로맹 가리는 한물 간 작가다'하고 무조건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평론가들에게는 이미 한번 검증을 치른 기존 작가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가리라는 사실은 그가 66살에 권총입구를 입속에 넣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하기 전 썼던 유서를 통해 밝혀졌다. '늙은 작가 로맹 가리는 젊은 작가 에밀 아자르를 모방하고 있다'라는 생전의 혹평까지도 즐겼던 그는 더 이상 쓸 것이 없을때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삶 자체에서 마지막 반전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조롱했다. 호평에 대한 사례를 해주지 않으면 다음 번에는 혹평을 퍼붓는 프랑스 기존 문단의 관례를 비웃으며 그는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자기 앞의 생이 더 유명해진 이유는 아마 젊은 신인 작가로 알려졌던 에밀 아자르가 감히 무례하게도 공쿠르 상 수상을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공쿠르 상 선정위원들은 '너는 이 상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식으로 다시 한 번 거부했다. 공쿠르 상을 수상한 것은 에밀 아자르라는 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앞의 생이라는 한 작품에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어쨌거나 수상을 거부했던 아니던 로맹 가리는 공쿠르 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가 되어 버렸다.

 

자기 앞의 생은, 열 네살인 모모와 예순 여덟 살인 로자 아주머니와의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로자 아주머니는 자식을 양육할 권리가 없는 창녀의 자식들을 정부 기관 대신 몰래 키워주며 가끔 만나도록 해주는 여자다. 그녀는 자신이 삼십 오년 동안이나 '엉덩이로 벌어 먹고 살아온' 창녀였기 때문에 양육권이 없는 창녀들의 아픈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모모는 그런 그녀에게 맡겨진 아이들 중 한 명이다. 모모의 본명은 모하메드로, 회교도(무슬림,이슬람)의 아들이다. 모모와 로자에게는 종교간의 벽이 있다. 로자는 유태인으로 나치 치하에 수용소에 끌려갔다 살아돌아온 여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듭이 있는데 그건 혈연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서로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의 약자라는 매듭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어느 사회에서건 핍박을 받고 무시를 당하며 꿋꿋하게 살아남아 자기 앞의 생에 용감히 맞서는 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다.

 

모모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사랑하는 로자 아주머니와 한 지붕 아래서 오랫동안 함께 사는 것. 모모는 행복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행복은 자신의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놈이며 이 세상에는 겪어봐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굳이 행복을 먼저 겪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독하게 뚱뚱하고 못생기고 치매에 걸려 시도때도 없이 아무곳에나 대소변을 보는 로자 아주머니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녀와 한 지붕 아래에 살아가는 나날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지만 모모는 그런 그녀의 변해가는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그녀와 함께 살아갈수만 있다면. 그래서 지하실에서 로자 아주머니가 죽은지 삼주일이 지났어도 가능한 한 그녀와 오래,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에 썩어가는 냄새를 향수로 덮어버리고 문드러지고 퍼렇게 변해가는 얼굴을 화장품으로 가리면서까지 함께 있었다.

 

너무 어릴때부터 세상의 밑바닥을 겪었다고 해서 인생을 다 산것처럼 생각할 것은 없다. 모모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았다고 생각해도 살아가는 도중에는 언제나 배워야 할 것 투성이라고. 많은 것을 배우고 겪고 생각하고 깨닫는 과정이 인생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자세가 바로 살아있는 자의 진정 생을 대하는 자세다.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인생으로부터 도망쳐서는 안된다. 모모의 말처럼 세상에는 행복 말고도 겪어봐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만약 로맹 가리가 자기 앞의 생을 통해 이런 말을 전달하려 했다면 그가 권총을 입에 물고 자살을 한 행동은 모순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는 한평생 자신을 글로써 표현하기 위한 삶을 살았고 더 이상 쓸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젊었을 때는 모모처럼 행복하지 않더라도 생과 대면하며 용기있게 인생을 헤쳐나갔지만, 자신의 사명감을 다했을 때는 죽음마저도 인간답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셈이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 당당하게 죽을 권리를 요구했던 로자 아주머니처럼, 죽음까지 자신이 직접 시기를 선택한 방식으로 온전히 인생 전부를 소유하고 마무리했던 거다. 글이 그 사람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표현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