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 사실주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 등 장르를 넘나드는 수식어를 가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무런 사전적 지식없이 그의 대표작 '픽션들'을 읽으면 대체 저자가 이런 텍스트의 장난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픽션들의 1부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정원의 서문에는 쇼펜하우어를 능가하는 회의적 모습과 불친절함이 묻어난다. 그는 단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는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를 몇 백 페이지에 걸쳐 늘여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답지 않게 자신의 단편 소설들의 짧은 길이에 대한 친절한 변명을 한다.
나는 보르헤스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사람으로서 픽션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찾아 도서관 서가를 뒤적거렸다. 아마 보르헤스의 픽션들 중 가장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바벨의 도서관이 아닐까 싶은데, 나 역시 그를 이해 하겠다고 또 다시 도서관을 파고 들면서 끝없이 펼쳐진 그 육각형의 도서관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를 알기 위해 또 다른 책을 펼쳐들고, 또 다른 책 속에 있는 의미를 알기 위해 또 다른 책 속으로 빠져들고.. 그러다 보면 결국 우리는 하나를 제대로 알기 위함일 뿐인데도 끝없이 도서관의 방대한 지식 미로를 헤매는 운명 속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1899~1986)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인·소설가. 실험적이고 독특한 발상의 작품들을 남겨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로 불리며 움베르토 에코 등 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이런 거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별 생각 없었던 현실 속에서 하나의 추상적 관념을 부과하여 낯설게 만든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수차례 다른 사람들이 언급했던 개념이므로 동어반복적이다. 하지만 분명히 관념을 부과했으므로 철학적이다. 그리고 문학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장치들을 전부 적용했으므로 실험적이다. 또 문학과 관념과 형이상학을 조합하여 그의 소신대로 짧은 텍스트 안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예술적이고 미학적이다.
각 소설이 전부 이러한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 어느 이야기에서는 실존 인물 아래 허구 작품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여 환상의 사실화를 더 부각시키기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형이상학이나 미학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그린다. 그는 자신의 전 작품에서 하나의 거대한 실험정신을 드러낸다. 움베르트 에코는 보르헤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아무튼 그에 의하면 보르헤스는 관념을 가지고 장난을 했다고 한다. 보통 소설가들이 단어라는 피상적인 이야기의 도구를 가지고 장난을 한다면 보르헤스는 그보다 좀 더 상위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가지고 장난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하도록 무언의 권위를 발휘하는 것이다.
몇 페이지 안되는 짧은 소설들을 읽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 없다. 하지만 읽고 나서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드는 시간은 긴 소설들에 비해 결코 짧지 않다. 보통의 보여주기식 소설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때 그 소설에 사용한 시간도 종료되지만 보르헤스의 소설은 페이지를 덮고 나서 생각하는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를 이해하려면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고자 하나 넉넉한 시간이 없는 사람은 시간을 따로 떼어 만들어야 할 일종의 의무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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