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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화합하는 정신 세계를 이룩한 크네히트 - 유리알 유희

gowooni1 2009. 5. 12. 18:25

 

[내가 읽은 책은 노태환 역의 백양출판사 작품. 번역이 잘 되어 있다]

 

 

유리알 유희 (세계문학 21)

저자 헤르만 헤세  역자 윤순호  
출판사 하서출판사   발간일 2008.03.27
책소개 헤세의 나이 65세에 완성된 헤세 문학의 완결판.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 1887-1952) 독일 시인,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일관된 작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시작하여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 그의 대표작을 보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란 어떤 모습인지 짐작 가능하다. 가령 '데미안'에서는 '막스 데미안'이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나르치스'가 그렇다.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전기와 유고집이 함께 묶여 '유리알 유희'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이 작품도 헤세의 레퍼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작가의 이상적 인간관을 반영한 사람은 요제프 크네히트다.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카스탈리엔에서 최고의 정신 산물인 유리알 유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의 최고 직위인 명인의 위치에 최연소로 오른 크네히트의 삶에 대한 전기가 이 책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유리알 유희란 가상의 유희다.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작가가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독자의 입장으로서 선뜻 이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유희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유리알 유희'를 읽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진정 중요한 것은 유희가 어떤 것이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적 유희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그 유희가 가지는 사회적 의의, 유희의 최고 연주자로서 오를수 있는 명인이란 위치의 의미가 더 중요하며 이를 읽다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이상적인 정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토피아, 카스탈리엔을 생각했을까? 그건 이 작품을 쓰게 된 시대적 배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가 유리알 유희를 쓴 시기는 나치 치하와 일치한다. 그 시기의 전 세계는 정신이 죽은 시대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을 포기하고 말도 안되는 전체주의에 빠져 도덕과 인간성을 상실했다. 증폭된 대중매체로 쓸데없는 잡문이 많아졌고 진정 정신적으로 유익한 문장들은 등한시 되거나 매장되었다. 생활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그날 그날의 쾌락과 안위를 누리며 내일이 없던 시기였으므로 그야말로 정신 생활의 위기였던 셈이다.

 

카스탈리엔은 이런 위기를 겪은 세대들이 더 이상 정신이 퇴보된 인간 생활을 경계하고자, 그리고 그것을 고양시키고자 설립한 기구다. 유리알 유희는 이런 정신의 유토피아에서 발전되고 전성기를 이루어낸 초고도 정신 유희이다. 말하자면 정신 세계의 최고봉이라고 축약할 수 있다. 이미 몇 세대를 거쳐 발전을 거듭한 정신 세계에 요제프 크네히트가 영입된 것은 약 서기 2400년, 그러니까 지금보다도 먼 미래의 이야기다.

 

유리알 유희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소설의 전체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써 놓은 개요,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크네히트가 조직에서 아직 연구생이던 시절에 작성한 유고집.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는 크네히트가 죽은 이후 후대들이 보고의 형식으로 작성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보고식의 딱딱한 문체가 소설을 읽는 재미를 약간 경감시키기는 하지만 지나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크네히트가 일생을 살면서 고유의 정신을 발전시킨 과정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여기서도 크네히트의 정신 발달 과정은 다른 소설의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조를 이루어 첫번째로, 어린 시절에는 기존 체제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환희를 느끼는 시절을 겪는다.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회의감을 느끼고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더 알고 싶어하며 내면적인 갈등을 겪는 시기를 경험한다. 자신과의 치열한 내부적 싸움에서 스스로의 해답을 찾은 이후에는 '합'의 시기가 온다. 기존 자신이 속해있던 시기와 자신이 치열한 싸움을 통해 얻은 새로운 세상과 화해를 통해 더 큰 정신으로 나가고 그런 큰 정신속에 온전한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스위스로 귀화한 그는<데미안><싯달타>등 많은 소설을 남김.

 20세기의 문명비판서라 할 수 있는 미래소설 <유리알 유희>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과정이 결정이고 예술이다. 이런 레퍼토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소설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과정을 천천히 음미하고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작가의 사상을 해석하면서 감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과 그와 대치되는 인물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서, 크네히트가 성장해 나가면서 깨닫게 되는 인생관에 속에서 절묘하게 드러나는 작가의 메세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진정한 예술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구절들이 전부 철학이고 진리여서 모든 줄을 밑줄치고 싶어지는 그런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독자에게 어쩌다 찾아오는 한줄기 빛과 같다. 헤세의 전 사상을 응집하여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한 유리알 유희는 1946년에 노벨 문학상의 영광을 받았다. 이는 정신세계의 위상이 높아지게 된 시대적 배경과도 일치한다. 1946년이라면 나치 치하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다운 삶과 정신적인 삶을 재조명하게 된 해였다.

  

소설의 결말 역시 작가의 성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예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식으로 끝이 나있다. 하지만 언제나 헤세의 결말은 예상하기는 쉬워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아직 독자(나)가 그를 이해하기에 덜 성숙했나보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감회로 다가오는 헤세의 작품들이야말로 독자와 함께 성장하는 책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항상 헤세에게 중독되고 그를 멘토로 신봉하며, 그의 작품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