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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와 사랑에 빠졌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 더 리더

gowooni1 2009. 4. 7. 22:28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역자 김재혁  원저자 Shlink, Bernhard  
출판사 이레   발간일 2009.01.29
책소개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나누기,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기... 케이트 윈슬렛 주연, 스티븐 달...

 

 

영화화 되고 나서야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들어온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5살의 미하엘과 36살 한나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 2부는 8년 후 법대생 신분인 미하엘과 피고인 신분의 한나의 법정에서의 조우, 3부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감방생활을 하는 한나와 그에게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꾸준히 보내주는 미하엘, 그리고 한나의 자살.

 

한 유명한 여배우가 어떤 책을 읽고 등장 인물을 한 번 연기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녀가 출연한 영화보다는 그 원작을 읽고 싶어진다. 어떤 책이기에 영화 제작자들의 투자심리와 배우들의 욕심이 한꺼번에 동하게 되는 건지 궁금하다. 잘 만들어진 한 작품이 가진 자장은 많은 독자와 영화 관계자, 배우, 영화 관객을 끌어당긴다.

 

1부 까지만 읽었던 어느 날 밤, 영화를 일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인터넷에 접속하여 주저없이 예매를 하고 다음날 제일 첫번째 시간에 영화를 봤다. 1부까지 본 내가 이해한 한나와 미하엘이라는 인물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떻게 그려졌는지 알고 싶었다.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미하엘은 내 머릿속의 미하엘과 많은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케이트 윈슬렛의 한나는 내 머릿속 한나와 조금 달랐다.

 

소설은 미하엘이 '나'가 되어 철저히 미하엘의 심리를 그린다. 1인칭 시점이므로 한나의 심리는 알 수 없다. 단지 미하엘이 말하고 보고 들은 한나만이 묘사되어 존재할 뿐이다. 세세한 심리묘사가 되어 있는 캐릭터라면 배우가 자신을 많이 개입할 필요없이 작가가 설계해 놓은 대로 연기하면 되지만 한나 같은 경우는 좀 다르다. 내가 생각한 한나는 배우가 연기한 한나보다 더 차갑고 냉정하지만 기대에 어긋난 한나가 연출되어 별로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한계상 겉으로 보여지는 개연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설의 한나와 영화의 한나가 조금 다른 것도 사실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들의 세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나치정권이 끝날 즈음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나치 앞잡이를 했던 사람들과 겹치는 시대를 살아야 했다. 한 시대,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그들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는 포용하면서 살아나가야 했던 전후 세대들의 심리를, 나치 앞잡이를 했던 한나와 어린 미하엘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나가고 있다.

 

그 설정이 과연 저자가 의도한 주제 의식을 나타내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다. 작품의 커플이 그들 세대 전체의 심리로서 일반화시켜 표현하기에는 그 케이스가 편협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소재도 적당히 자극 있고 한나의 약점이 드러나는 과정도 흥미로우며 출간 후 꾸준한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 저자와 동시대 동나라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공감되는 모양이다. 한나처럼 단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치 앞잡이를 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을 이해 하는데 한 치의 관용의 폭을 열어 줄 수 있는 작품이랄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도 전후에 세계 어느나라 못지 않은 피해자이고, 나치 앞잡이처럼 일제 앞잡이를 했던 동시대 한국인을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는 논리가 나오는데 글쎄. 이렇게 우리 입장에서 적용해 보니 또 다르다. 과연 일제 앞잡이를 하여 많은 국민들을 죽인 매국노를 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또 하나 생각해보자면, 우리나라처럼 어영부영하게 매국노들을 그냥 넘긴 나라도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양차 대전후 제국주의가 물러간 모든 다른 나라들은, 적게는 몇 천 명에서 몇 만 명까지 배신자들을 응징했다. 반면 우리는 친미주의에다 지지 세력이 없어 매국노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던 이승만 정권 때문에 단 십수 명만 사형 선고를 받고 또 그 중 일부만 처형된 역사가 있다. 매국노들에게 피해를 당한 자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지 못했던 나라의 정권에 대한 응징은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유야무야되고 화살은 공산주의자에게로만 돌려졌으니 참 씁쓸하다. 이 씁쓸함을 달래주는 것은 이제 그런 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서 분노조차 희미해졌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