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행복만 가득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 올더스 헉슬리

gowooni1 2009. 5. 2. 11:03

 

 

 

멋진 신세계

저자 올더스 헉슬리  역자 정승섭  그림 바나나몽스  
출판사 혜원출판사   발간일 2008.08.25
책소개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올더스 헉슬리의 미래소설『멋진 신세계』. 헉슬리는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때는 포드 기원 632년. 사람들은 자신의 등급에 맞춰서 양육되고 조절된다. 등급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에 각각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나뉘어져 있고 모든 사람은 인공부화 조절국에서 태어난다. 알파 등급으로 '부화'된 사람은 최고의 엘리트로서 사회의 지도계층에 맞도록 교육되고, 천한 일을 하도록 태어난 엡실론들은 복잡한 일을 하지 않고 삶을 영위해도 되는 자신들의 위치에 만족하게끔 '세뇌'된다. 고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며 행복한 삶을 누린다. 멋진 신세계 안에는 노화도 없고 고통, 격심한 감정, 슬픔, 노여움의 감정이란 철저히 배제된다. 이 사회는 오로지 구성원들의 행복만을 보장하며 그를 위해 '소마'를 제공한다. 때때로 기분이 우울하거나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소마'만 복용하면 문제없다. 그들은 다시 쾌활한 기분으로 돌아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절국에서 일하는 여직원의 작은 실수가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열등감 덩어리 인간을 만들었다. 버나드는 엄연히 알파 계급의 최상위이지만 그의 체격은 알파보다 열등한 계급의 것이다. 그는 '소마'를 복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열등감으로 인한 우울한 기분을 그냥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런 버나드를 별난 사람 취급을 한다.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속해 있으므로 철저하게 개인이 무시되는 멋진 신세계에서 버나드는 유별나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우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에 당당하게 지도계급으로 군림하고 싶어하지만 자의식이 강하여 공동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버나드다.

 

그런 버나드에게는 헬름홀츠 왓슨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버나드와는 달리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잘 나가는 엘리트다. 그러나 그런 그가 열등감 덩어리 버나드와 공통점이 있다면 헬름홀츠 역시 개인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기존 사회계급에 속하고 싶어하는 버나드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버나드는 자신의 개인으로서의 감정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발전시키고 싶어하나,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때문에 갈등하는 것이다. 즉, 버나드가 공동생활에 위치를 다지고 싶어하는 개인성을 가지고 있다면 헬름홀츠는 자신만의 생각과 세계를 갖고 싶어서 개인성을 향상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야만인 세계에서 온 '존'이 멋진 신세계에 합류한다. 야만인의 세계는 현대의 우리보다 더 원시적인 세계다. 미신적인 주술이 넘쳐흐르고 책은 물론 문자를 모흔다. 그들은 흙을 발라 놓은 집에 사는 일종의 콜롬부스 시대의 인디언들이다. 존은 엄마의 자궁에서 잉태되어 태어났고 엄마라는 존재에 의해 자랐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세익스피어를 읽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낄 줄 알고 엄마가 죽으면 슬퍼할 줄도 안다. 진정 고귀한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고결하게 지키고 싶어할 줄 안다.

 

그런 '존'이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을 이해할 리는 만무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는 이 세계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은 채 난교가 성행하고 물론 그들 사이의 질투도 없다. 가슴 애태우는 사랑을 모르는 이 곳의 사람들은 마음에 들면 곧장 함께 자면 된다. 그런 세계의 여자 레니나에게 존은 창녀와 같다고 실망하고, 엄마가 죽어서 슬퍼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다. 결국 그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생활을 하기 위해 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이게 흥미를 끌고 있는 야만인 존의 생활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영화의 소재로 쓰이며, 그가 홀로 살고 있는 곳에 문명인들이 구경하러 온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기 위한 것처럼. 야만인의 세계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문명인과 물질적인 거리만 떨어진 채 살아가는 존은 결국 문명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문명인과의 완절한 단절을 위해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포드기원 632년이라는 것에 이미 멋진 신세계를 살고 있는 자들의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 이 세계는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는 없고 A.D 또는 불弗기 같은 것도 더더욱 없다. 오직 헨리 포드가 T형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해가 기원이 된다. 대량생산을 좀 더 쉽게 만든 헨리 포드를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는 문명인들에게 있어 대량생산은 미덕이고 개성화는 악덕이다. 모든 사람은 비슷해야 하고 같은 가치관을 가져야 하며 튀면 절대 안된다. 각자의 위치에 맞는 곳에서 만족하며 늙지도 않은채 행복(하다고 세뇌된) 삶을 살다가 60대에 이르면 갑자기 죽으면 된다. 물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없으며 죽으면 일제히 소각장으로 보내져서 각종 구성요소로 바뀌어진다.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사회의 구성물질로 재활용될 수 있는 극대화된 효율성에 찬사를 보낸다. 왜 멋진 신세계인지는 금방 짐작이 간다. 인간의 최종 목표는 행복이라고 배워왔던 우리들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계를 충분히 멋진 세계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은 여기에 당당히 맞선다. 그는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고, 눈물을 흘릴 권리를 요구한다. 슬퍼하고, 분노하고, 각종 전염병에 걸려 고통스러워 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 마음 아파할 권리를 요구한다. 그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기 때문이다. 불행과 고통을 모르는 자는 결코 극대화된 행복을 경험할 수도 없고 삶의 보람과 열정을 느낄 수도 없다.

 

분명 이런 세계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도 사양한다. 이런 삶을 우리는 인간적인 삶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저 행복하기만 한 삶, 공동체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각자 안에 자신을 소유하고 있으며 개성의 극대화를 이룩하며 보다 나은,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인간다운 삶이며 나다운 삶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가 멋진 신세계와 기본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그저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삶이 미덕이라고 배워 왔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않은 채 위로 나아가려는 욕심을 가진 자를 사회 불순분자라며 매몰시켜 버리려는 대중적 특성이 있다. 죽도록 슬픈 마음이 들면 자살로 그 고통을 끝내버리거나, 약물 또는 기타 중독성 매체들을 의지한다. 일부일처제라는 사회적 장치는 존재하지만 난교를 하지 않는 사회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런 우리들이 포드 기원을 살고 있는 그들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다른지를 경각심을 가지고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분명 올더스 헉슬리의 이 작품을 읽고나면, 인간적인 우리 자신에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인간이라서 다행이다, 부모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며,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어서 다행이고, 얻기 힘든 것을 이룩했을 때의 극적인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이런 삶의 전반적인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각종 슬픔, 고통, 괴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부모와 싸우고 나서 괴로워할줄 아는 마음을 가져서 다행이고, 연인과 헤어져서 죽도록 아픈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며, 이루지 못한 것을 갈망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렇게 '너무나 인간적인'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