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작가들 중, 특히 소설가 중에는 작품의 내용과는 전혀 연결성이 없는 제목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부지기수한데 1995년 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은희경의 '새의 노래' 역시 이런 작품 중 하나다.(물론 그녀의 예전 인터뷰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동떨어진 제목이므로 독자들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제목의 뜻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소설은 거의 400페이지에 육박하여 가볍게 보려고 집어든 내게 3일이 넘는 시간을 요구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새의 선물을 읽는 3일은 무척이나 행복해져서 12살 이후로는 성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조숙한 주인공 강진희에게 미안했다. 강진희는 너무 조숙해서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 사이에 명백한 경계를 설정하고 항상 자신의 감정에 거리를 두는 시니컬하고 불행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런 불행한 주인공이 들려주는 이야기치고는 읽는 이로 하여금 작품 세계에 행복하게 빠져들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마냥 행복한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새의 선물은 60년대에서 70년대를 넘어가는 시대를 살았던 소읍의 생활상을 리얼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다 그렇듯 가난한 개발도상국 직전의 사람들이 아등바등 살아야 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부자나라의 도시이건 가난한 나라의 시골이건 사람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드라마가 있기 마련이므로 즐거운 이야기도 있고 비극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가난한 시골의 비극이 부자 도시의 비극보다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소읍 어느 마을의 한 우물을 둘러싼 집들을 배경으로 하고 그 집에 사는 여러 가족들이 등장인물로 설정된 이 소설은, 등장인물 수 만큼 많은 이야기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캐릭터들이 한데 섞여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반응들은 그 자체로 드라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주고,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후세에게는 이전 세대들이 건너온 세월이 어떤 세계인지 보여준다. 모든 독자를 69년도로 끌어들이는 이 소설은 분명 리얼리즘이 반영되었다는 평가를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건 어느 시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진리,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틀만 바뀌지 내용물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진리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라고 페미니스트들이 분노해도 60년대 많았던 매 맞는 여성들은 21세기에도 분명 있다. 닐 암스트롱이 처음 발에 달을 내디딘 것을 보고 이제 천지가 개벽할 거라고 호들갑 떨던 69년도의 정경은, 우리나라 첫 우주인이라고 대대적으로 방송하던 이소연이 탑승한 우주선 발사를 보며 소란 피우던 2008년도에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내용이 아닌 틀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내용은 전 시대를 넘나들며 배우고 틀은 미래를 향해 업그레이드 하며 살아야겠다. 이런 결심 역시 우리 이전에 살다 간 사람들이 한번씩은 생각해본 것일테니, 정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별로 없나보다.
'문자중독-Reading > 문학*문사철3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국노와 사랑에 빠졌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 더 리더 (0) | 2009.04.07 |
---|---|
동정童貞없는 세상-박현욱 (0) | 2009.04.06 |
나의 작은 새-에쿠니 가오리 (0) | 2009.03.19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0) | 2009.03.14 |
변신-프란츠 카프카 (0) | 2009.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