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세트(전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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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유학간 한 친구가 현지 주민이 운영하는 집에 머물게 되었다. 로마 시내에 있었는데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굉장히 낡고 고풍스러운 집이었다. 나무 판자로 된 플로어는 걸을 때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났고 계단 옆에 세워진 난간은 흔들거려 제 구실을 듬직히 해낼것 같지 않았다. 전기선은 언제 설치했는지 감전사고라도 날까봐 위태로웠고 실제로 정전은 일상다반사였다. 친구는 조심스럽게 집 주인에게 물었다. 이렇게 살면 불편하지 않냐고. 그러나 집주인은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예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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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월정교 공사 프로젝트를 맡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내게 물었다.
"지붕이 있는 다리를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왜 갑자기? 활용하지 못하면 프로젝트 중단이라도 하겠대?"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자꾸 딴지를 걸잖아. 쓸모없는 다리 만들어서 뭐할거냐고."
그렇다. 우리는 그저 예쁘기만 하면 안된다. 반드시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하면 그 가치는 하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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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과학이 아직 명확히 분리되지 않았고, 또 예술이 곧장 미美를 뜻하는 대명사가 아니었던 시절에 칸트는 이 둘을 접목시켰다. 예술은 쓸모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이런 개념이 상식처럼 되어버렸지만 칸트시대에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는 바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다. 존재의 목적은 없지만, 그저 존재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미학이다. 이 개념은 후에 좀 더 발전되어서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물론 미인은 예쁘다는 것 자체로 용서된다는 우스운 적용은 아니고,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충분히 합목적적이라는 뜻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반드시 뭔가를 이루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이전에 실존한다.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실존주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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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반드시 쓸모있음을 고집할까?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그리 각박할까? 예술이나 미학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이유를 찾아보았다. 우리는 정녕 아름다운 것, 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을 못마땅해하는 심성을 타고 난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건 별로 생각해볼만한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예부터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고 정신적인 것, 사변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을 숭배해온 민족도 없다. 문신들이 무신보다 훨씬 대접받았던 것은 당연하고 야만족인 거란이나 말갈을 혐오하고 문화적으로 뛰어났던 송나라나 명나라를 본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극단적으로 정신적인 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실생활에 쓸모있는 것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나 들어서야 실학사상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만약 이 시기에 실학사상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또 현대에까지 그 정신이 이어지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아름답지도 못하면서 불편한 생활을 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덜 사변적이고 형이하학을 존중하는 자세에는 기꺼이 감사의 표시를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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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학에 관대하지 못하고 무지한 이유는 우리 민족성에서 찾을 것은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있을까. 그건 현대의 미학이 우리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일거다. 확실히 근대들어 미학이라는 이름을 얻고 학문적 명성을 누리며 발전된 것은 우리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발생되었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의 철학자, 또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중세의 예술가는 서양의 풍토에서 나고 자랐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들어본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소한 다른 풍토의 학문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그들의 미학을 학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교양을 쌓는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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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는 세계화된 사회이다. 지식에 동서양 가릴것 없이 넘나들고 있는 시대이다. 그러니, 미학은 우리것이 아니야, 라고 배척하는 마음보다는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면 좋겠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재미를 느낄수 있을지 모른다. 마음은 충분히 오픈되었는데 미학이라는 것이 여전히 학문으로 생각되어 머리아플것 같고 인상이 찌푸려질 것 같다면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를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한다. 저자도 이미 말하고 있지만, 이 책은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의 구성을 정말 많이 따라하였다. 내용과 주제는 물론 다르지만 에셔의 그림만큼은 많이 나온다. 아무래도 주제가 미학이다보니 근대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에셔를 빠트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바흐의 3성대위법을 따라한 책의 절묘한 구성은, 이 책을 저자가 마치 가지고 놀듯 재미있게 썼다는 기분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지은이가 유희하듯 즐겁게 쓴 책은 읽는이도 놀이하듯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법이다. 구성의 재미를 느끼며 눈에 미끄러지는 듯한 활자를 쫓아가다보면 미학의 전체적인 역사와 그 개괄적인 내용이 머릿속에 정리되는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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