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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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트 러셀 (1872~1970)
20세기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인 '버트런트 러셀'. 1872년에 태어나 1970년 98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40여권의 저술과 3번의 이혼, 4번의 결혼(마지막 결혼은 79살에 했다)을 하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의 이런 화려한 이력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웬만한 포털 사이트에 인물 등록도 되어있지 않다) 그는 그의 스승이자 공동 저자인 '화이트 헤드'와 '수학 원리'를 지어 현대 기호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이뤘다. 그의 책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감이 있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행복론'은 매우 쉽다. 공원에 가서, 러셀이라는 할아버지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그가 조곤조곤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있는 기분이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서 독자가 그의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실제로 나는 그가 '행복론'을 쓰게 된 심적 기반에 대해서는 다소 거부감이 들었는데 그건, 불행을 직시해야 불행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논리는 불행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공포를 피하려면 공포를 직시하여 마침내 '그것이 별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때 까지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글쎄, 나는 좀 다르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에 잠깐 들 수는 있어도 그것을 무시하고 금방 다른 생각으로 전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머리 위로 '부정'이라는 이름의 새가 잠깐 앉았을 때, 그 새를 두 손으로 잽싸게 잡아 뚫어지게 보는 것보다는 손으로 훌훌 쫓아 버리는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뭐, 그렇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러셀의 행복론은 불행을 파고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의 논리 아래서 불행의 원인이 분석된다. 사람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여러 감정들을 직시하고 그런 감정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한다. 심오하게 정신분석학처럼 분석하는 것은 아니고 일반인의 관점에서 가볍게 분석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부정을 직시해야 부정에서 벗어난다는 그의 논리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분석한 불행의 심리 메커니즘은 매우 그럴듯 하다. 권태, 걱정, 질투, 죄의식 등을 분석하고 결국 인간은 이런 감정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으며 이런 소모적인 감정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나는 요즘 2가지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데, 하나는 '끝없는 자아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고, 둘째는 '자아를 잊고 세계, 우주로 관심을 돌려 우주시민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다. 내 멋대로 내린 결론에 의하면, 전자로 대표되는 사람은 헤르만 헤세나 에리히 프롬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와 버트런트 러셀이다. 어느 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발상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시기에 맞추어 자아속으로 침잠해야 하는 때가 있고, 우주시민의 일원으로 살아야 하는 때가 있다고 믿는다. 끊임없이 자아 속으로 침잠하여 개성의 극대화를 이룬 후에, 시선을 세계로 던져 내가 이룬 개성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우주시민의 일원으로 살아가야겠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직 나는 후자의 단계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엔 쌓아 올린 개성이 지극히 빈약하다.
아무튼 러셀은 자아도취, 아집, 자아로의 침잠이야말로 불행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특히 자아 도취는 과대망상만큼 나쁘다고 한다. 자신을 잊고, 자아를 보다 좀 더 높은 초월적 존재에게 맡긴 채 세상으로 눈을 돌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일에 몰입하기 힘든 것은 마음이 방해를 하기 때문인데, 마음은 곧 자아다. 쉽게 몰입하여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의 자아따위는 초월적 존재한테 맡기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이것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러셀은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곁들이고 있다.
옛날에 돼지고기를 진미의 소시지로 둔갑시키는 희한한 소시지 기계가 두 대 있었다. 이 기계 중의 하나는 돼지고기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고 소시지를 무수히 생산해냈다. 다른 기계는 "나와 돼지고기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야? 내가 하는 일은 돼지고기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놀라운 일이란 말야"라고 말했다. 그는 돼지고기를 거부하고 그의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료인 돼지고기가 들어오지 않게 되자, 그의 내부는 기능을 멈추었고, 그의 내부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내부가 더욱더 공허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진미의 소시지를 만들어내던 교묘한 장치는 모두 정지했고,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당황하게 되었다. 이 두번째 소시지 기계는 열의를 상실한 사람과 같고, 첫번째 기계는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다.
말할 것도 없이, 자아로 침잠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행동따위는 그만 두고, 세계로 눈을 돌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열정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르는 길임을 시사하는 이야기다.
책의 전반부가 불행의 분석을 제시한다면 후반부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러셀의 논리 자체가 부정을 분석하여 부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후반부보다는 전반부에서 더욱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잘 나타나있다. 후반부 행복에 이르는 길은 오히려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다소 지루한 느낌까지 든다. 결국 책의 마지막에서 그가 내리는 부분은 책 전반부에서 내내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려 우주의 일원으로서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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