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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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 있다면, 그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1859년에 지어진 이 책이 150년이 지난 지금 읽혀도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슬픈 현실이다. 150년 전의 민주주의나 현대의 민주주의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역사상 '완벽한' 체제라는 것은 존재해본 적이 없고, 하나의 체제가 그나마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어김없이 몰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아직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구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발전의 여지가 남았다는 뜻일수도 있겠다.
민주주의가 개인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자유'일 것이다. 민주주의 이전에는 개인이 없었다. 전체속의 군중, 전체를 위한 인간이 있었을 뿐, 개인을 위한 개인은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다수에 의해 개성을 몰수당해야 했으며 전체속으로 파묻혀야만 그나마 보통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독특한 개성을 소유한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해 인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그 역사는 매우 짧은 셈이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보면, 인간이 불평등하게 된 그 최초의 감정은 자신보다 잘난 사람에 대해 느끼는 존경의 감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나와는 달리 뛰어난 점을 가진 타인에게 존경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을 볼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의 장점을 보며 존경을 하는 것은 오히려 인류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 내부로 향한 눈을 가지지 못한 속좁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보다 월등한 타인에게 존경심을 품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존경심은 이내 시기와 질투로 변색되어 버린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생산적인 존경심을 가지는 아량을 지니지 못했다.
남들의 독특한 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평준화 될수밖에 없다. 평준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의 평준화란 하향평준화일 수 밖에 없다. 상향평준화를 이룩해야 인류가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남들의 잘난점은 깎아내리고 마는 사회에서 상향평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 상향평준화를 이룰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건 개개인의 마음가짐에 전적으로 달려있는데, 그 마음가짐이란 바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오픈마인드다. 뛰어난 개성을 소유한 사람들을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보며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각자가 개성을 극대화 시키면 우리는 그것들을 비교 분석하고 좋은 것은 받아들이며 상생의 길을 찾을수 있다. 이 길이야 말로 인간이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이 누려야 하는 자유에 대해 말한다. 생각과 토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나아가서는 사회가 개인에게 제약할 수 있는 자유의 범위에 대해 말한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생각과 토론의 자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거듭 말하면서, 다수에 의해 소수의 의견이 묵살당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다수가 소수를 무시하는 것은 전체가 개인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뛰어난 개인이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하고 폐쇄적인 사회인지는 이미 위에서 설명했다.
밀은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를 두가지 말하고 있다. 첫째로는 소수의 의견이 진짜 맞을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수가 틀리고 소수가 옳다면 우리는 옳은 의견을 받아들여야한다. 둘째, 소수의 의견이 비록 틀릴지라도 그들의 반론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옳은 의견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반대되는 의견에 반박하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견을 검토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서 자신의 의견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완벽한 것으로 발전시킬수 있다. 소수의 의견을 원천봉쇄한다는 것은 어찌 되었건간에,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와 동시에 밀은 국가가 개인에게 제한할 수 있는 자유의 범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인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그 한도내에서는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수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술을 팔지 못하는 법을 내린 적이 있다. 표면적으로 이 법은 술 판매자들을 압박하는 법이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술을 마시는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럼 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을까. 그건 청교도적인 발상에서였는데, 기독교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결국 술을 팔지 못하게 하는 법은 술을 마시고 싶다는 개인의 자유를 넘어서 종교적 규율까지 강요하는 법이었다. 분명 이런 법은 민주사회에는 맞지도 않을 뿐더러 없어져야 한다. 국가가 간섭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이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고 나서 타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만 국가가 간섭을 할 수 있다. 개인이 술을 적당히 마시고 즐기는 것은 개인의 자제력에 달린 문제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자제력을 잃은 사람이 타인에게 해를 가했을 경우에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해를 가한 사람은 분명 자유를 누릴 권리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했을 때 제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딱 잘라서 말할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적용해보자. 우리나라는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헬멧착용을 강제하고 있다. 이는 헬멧을 착용하기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헬멧을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 한 개인이 미착용인채로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뇌진탕으로 죽었다고 가정해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헬멧을 착용했으면 단순한 사고로 끝날수도 있는데 큰 사고가 되어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죽은 사람의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해를 미치게 되는 것이다.
국가는 가능하면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말아야 하지만,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을 때 사회적으로 더 큰 파장을 몰고 올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예견하고 어느정도는 제한을 가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 여부가 발생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찬성과 반대의 입장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만약, 찬성이나 반대 한 쪽이 압도적인 수로 우세하다고 해도 열세한 쪽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소수의 의견은 민주주의 사회가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선진화된 민주사회를 이룩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참 많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의식개혁이다. 밀의 자유론이 150년 지난 고전이라고 해도 전혀 고전답지 않은 고전이다.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 더 나은 사회를 이루는데 한 몫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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