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대우고전총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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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률이 현저히 낮은 대한민국에서는 문자를 이용하여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과 백여년 전만 해도 문자를 사용하여 사상을 얻고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별 노력 기울이지 않고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 체계를 남겨준 세종대왕에게 감사할 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숨쉬는 것처럼, '읽는 행위'를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건 언어는 단순히 기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 나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약속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호가 된 것이지, 만약 몇 사람만이 전유하고 있는 기호라면 암호가 된다. 우리는 이 '암호'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암호'를 통해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해독한다.
이게 바로 일반인들이 흔히 하는 독서다.
'암호'라고 말해서 좀 거창하긴 하지만, 사실 별것 아니다. 이미 말했지만 우리의 '해독'은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책은 해독하는 즉시 우리의 뇌세포에 쏙쏙 달라붙는 '쉬운'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가 친절해서,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전제 하에 쓰여진 책들이라면 거의 그런 편이다. 물론 저자가 친절한 이유도 있겠지만, 저자가 말하려는 내용이 보다 '덜 추상적인' 내용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독자는 대부분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에 더 친숙하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릴때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다. 물론 어리기 때문에 '착한 어린이'가 어떤 어린이를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개념이 들어서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해하기 시작한다. '버스에서 노인분들께 자리를 양보해주고,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것,(주우면 더 좋고) 어른을 보면 허리굽혀 인사를 하고,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에게는 어른스럽게 책임을 지며 행동하는것'이 바로 '착한 짓'이다. 확실히 이렇게 행동요강을 알려주면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행동은 착한 짓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착한 짓이 행동보다 더 큰 개념이라는 말이다.
만약, 저자가 말하려는 개념이 너무 커서, 고쳐 말하면 매우 추상적이어서 자잘한 예시로는 설명되지 않을 수가 있다. 코끼리를 설명한다고 말해놓고 단순히 코끼리의 다리만 설명하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엄청나게 많은 예시를 들어가면서 겨우 하나의 코끼리를 설명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려면 저자의 '독자를 위한 친절한 배려'가 있어야하겠고, 엄청난 량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며, 그것을 해독할만한 독자의 인내력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의 '큰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되새김질 해가며 그 뜻을 음미하고, 반복해서 읽는 착한 독자의 자세가 요구된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은 이런 '착한 자세'가 필요한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지면 뒤에 가려져있는 저자의 큰 사상에 숙연해진다. 지면 위에 암호화 되어 있는 글자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가 생각하고 있는 생각이 너무도 크고 추상적이어서 암호화 하는데에도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불친절한 철학자로 유명한 헤겔과는 달리 이 책에는 저자의 친절한 배려(예시)도 엿보인다. 그러나 이런 예시는 빙산의 일각중에서도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빙산의 일각도 계속 보고 있으면 빙산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빙산은 얼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사실 실천이성비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좀 만나보고 싶다. 10번은 더 읽어보아야 이해가 가능할 듯 하다. 그러나 이 책이 '양서'임은 확실히 알겠다. 책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지식을 쌓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을 넓히는 책이다. 쉽게 말하면 머리 공부하는 책과 마음 공부하는 책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이 두가지를 아우르는 책이 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책은 하나를 노린다. 하나만 노리고 써도 제대로 겨냥하기 힘든게 현실이다. 그러나 양서라고 불리는 책들은 보통 이 두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고, 실천이성비판 역시 그런 책 중의 하나다. 저자의 암호를 해독해 나가면서 머리 공부를 할 수 있겠고, 그 뒤에 숨겨진 칸트의 높은 도덕과 선에 대해 숙고해 보면서 마음 공부를 할 수 있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칸트의 묘비에 새겨있고, 또 실천이성비판 맺음말의 첫구절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하늘(자연)에 대해 숙고하면서 외경의 자세를 가지기에는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고 아끼고 사랑하자고 배워왔으니까. 그러나 각자 자기 안에 '숙고하면 할 수록 외경스러운 도덕법칙'을 지니고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모든 사람이 성인군자가 되는 멋진 세상이 되겠다. 살아가면서 각자 자신 안에 도덕을 쌓는다면 생의 마지막 눈을 감을때 인생 보람있게 살았다고 자부하며 떠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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