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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노마드의 바이블-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gowooni1 2009. 1. 10. 20:29

 

 

 

소유냐 존재냐

저자 에리히 프롬  역자 차경아  원저자 Fromm, Erich  
출판사 까치   발간일 2007.04.20
책소개 소유와 존재에 대해 논한 에리히 프롬의 사상체계 입문서. 인간 성격의 두 가지 기본 성향인 이기심과...

기왕 한 번 태어났으니 제대로 살아보고, 사랑도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집어 들었던 '사랑의 기술'. 그 책은 나와 에리히 프롬이 처음으로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주제를 그처럼 딱딱하게 다룰 수 있는 저자의 '학자스러움'에 한 번 놀라고, 최고로 이상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두 번 놀란다. 특히 두 번째 놀라움은 인간에 대한 고찰과 진한 인류애가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1900~1980)

 

이후 '에리히 프롬 세계(The World of Erich Fromm)'로의 짧은 여행을 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지나 드디어 '소유냐 존재냐'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비로소 프롬의 영원한 팬이 되고야 말았다. 지금껏 내 정신세계에서 부동의 1순위를 차지하고 있던 내 마음의 바이블 '데미안'이 그 위치의 위태로움을 절실하게 느꼈지만, 난 이 두 작품-'데미안'과 '소유냐 존재냐'-과 두 사람-'헤르만 헤세'와 '에리히 프롬'-을 공동의 위치에 올려놓고 내 멘토로 삶기로 결정했다.(이미 둘 다 고인이므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수는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어릴 적 '데미안'에 빠졌었는지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 어린시절, '데미안' 중의 '막스 데미안'이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꼈었는지 분석할 수 있었다. 그건 '막스 데미안' 이야 말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삶을 제대로 사는 사람, 주인공 '싱클레어'의 멘토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 역시 '소유냐 존재냐'에서 같은 맥락의 철학을 전파한다. 모든 사람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어야 하며, '단지 존재함'으로써 행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존재한다'는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삶을 말한다.

 

 20세기 들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공통적 가치관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것과, 제대로 살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이 말인 즉슨,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이나 믿음의 가치는 전락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야 말로 우리의 인생을 보다 확실하게 보장하며 안락한 삶을 꿈꾸게 해준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존재가치와 동일시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내가 가진 집, 차, 돈, 직장 등이 사회 속에서 나의 위상과 권위를 표현하는 기이한 구조로 변질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 자신일 수는 없다. 내가 소유한 것이 나 자신이라면, 그것들을 한 순간이 잃어버렸을 때 '나'도 함께 없어진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내가 한순간에 집, 차, 돈, 직장을 모두 다 잃었다 한들 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큰 충격을 받기는 하겠지만 '나'라는 존재는 목숨이 붙어있는 한 없어지지 않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부작용은 수도 없이 많지만 아마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을 소유를 추구하는 삶으로 변질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특유의 인류애를 그의 전 저술에 나타내고 있는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도 당연히 인간의 존재를 설파한다. 우리는 '소유적 실존양식'에 따라 살지 말고, '존재적 실존양식'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이것의 차이를 일상적 경험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의 차이점]

 

 소유

 존재

 학습

 학생들은 남이 확인해놓은 주장들을 소유하기 위해 머리에 집어 넣음으로써 소유함.

남들의 사상을 경청한 수 그들 고유의 사유과정을 통해 자기것으로 만듬.

 기억

 기억해야 할 것을 메모한 후, 메모지를 소유함.

 기억해야 할 것을 나름의 정신적 규칙에 의해 기억하여 필요할 때 언제든 환기시킴.

 대화

 해야 할 말을 미리 적은 후, 그것만 읽거나, 자기의 사상만을 고집함. 승자와 패자만 존재할 뿐.

미리 대비하거나 무장하지 않고 자발적이고 생산적으로 반응함. 자기의 고집이 없으므로 분쟁이 발생하지 않음.

 독서

 단순한 줄거리의 파악 및 암기. 읽었다는 사실이 중요.

심층적 사상 파악. 생산적 독서.자신의 기준에 따라 비판. 

 지식

 보다 많이 아는 것.

보다 깊이 아는 것. 

 신앙

 스스로 모색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확신을 원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

 일차적 특정한 이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닌, 내적인 성향, 일종의 마음가짐. 신앙의 안에 있는 믿음.

 사랑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함.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상대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며 상대의 생동감을 증대. 

 

 

 이렇게 분류한 것만 봐도 프롬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소유적'인 삶이 아닌 '존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유는 사물과 관계하며, 존재는 체험과 관계한다. 여기서 무엇을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 사람들은 진정 모두 '노블레스 노마드'적인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형적 가치에 연연하지 않고, 체험, 경험, 교육 등을 중요시 하며 자신 내부에 보다 큰 가치를 쌓는 삶. 이 방식이야말로 진정 인간이 '존재'로서 살 수 있는 길 아닐까 싶다. 유대인이 전 세계적으로 무척 적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이 추구했던 삶이 바로 진정한 노블레스 노마드의 삶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도 없이 항상 쫓겨다니고 약탈당했던 그들의 긴 민족적 역사를 볼 때, 머릿 속에 든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산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던 그들의 삶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진정 '존재적'인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현대판 노블레스 노마드의 교과서'를 쓴 에리히 프롬이 이 책을 저술한 때는 1976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3년이나 더 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프롬의 사상이(이 책뿐 아니라 다른 저서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것은 급격히 바뀌지 않는 사람 심리의 특성 덕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이 좋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이미 30여년 전 프롬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아 존재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더라면 그의 저서는 이미 우리에게 필요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말년의 프롬 

 

비록 책의 결론이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이긴 하지만,(좀 더 획기적인 결론 도출을 바랐기 때문에 조금 실망감도 컸다) '소유냐 존재냐'야 말로 '진정 제대로 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근본적 구조조정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상을 담은 책 치고는 쉬운 편이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조금의 도전정신만 있으면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