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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적극적인 자유를 누리자

gowooni1 2008. 12. 29. 10:38

 

 

 

자유로부터의 도피

저자 에리히 프롬  역자 원 창화  
출판사 홍신문화사   발간일 2006.06.15
책소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살펴보는『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제5권.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진정...


 

시오노 나나미는 서양의 중세가 암흑시대일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기독교에서 찾는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에 사람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많은 문화를 창조하며 살았지만, 전체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에서는 개인을 철저히 무시한다. 원죄를 들먹이며,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속죄를 해야한다고 하는 종교안에서 인간이 중심이 되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란 힘들었다. 전체 안에서 항상 속죄를 하면서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진 자기 고유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만이 인간이 태어난 이유였다.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문명 아래서 인류는 자신을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텅 빈 자아를 느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럴 자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것이 기독교였다.

 

원래 종교라는 것은 지배계층이 하급계층을 좀 더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해 만든 환상이라는 말도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나일강 범람을 이용했다. 그들은 자연과 날씨의 오랜 관찰로 인해 얻어진 나일강 범람 시기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신의 자식들인 것처럼 민중들 앞에서 쇼를 했다. 범람할 시기가 오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드려 비가 오게 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민중들은 파라오들이 정말 신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호응하여 비를 내려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지배계층은 자신의 위치를 좀 더 곤고히 하고, 민중들은 그들에게 그저 감사해했다. 아직 종교라는 개념이 확실히 들어서기 전의 일이었지만, 심리적 메커니즘은 비슷하다. 그리고 기독교 역시 지배가 힘들었던 시기에 개인을 전체의 일부로 전락시키고 지배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행동윤리규범이었다.

 

그렇게 십수세기가 흐르는 동안 중세는 아무런 문명적 꽃을 피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좀 부유해진 사람들 사이에서 문화가 부흥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르네상스시기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볼 정신적인 넉넉함이 있었고 문화가 서서히 꽃피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붕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자유를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안정감과 소속감을 주는 전체를 쉽게 버릴수는 없었다. 그러다 루터와 칼뱅교가 나타나 개인을 중시하는 종교를 설파하지만 이들 역시 한계가 있었다. 이들은 개인을 중시하되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싫어하는 부류였다. 개인이 자신을 찾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 안정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그런 한계가 있는 자아찾기에서 사람들은 갈등을 느꼈겠지만, 크게 부인하지도 못했다. 여전히 개인은 자유를 얻음으로써 함께 짊어져야하는 고립과 소외의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거대한 조직의 일부 톱니바퀴가 되는 개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루터와 칼뱅교로 인해 사람들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신의 미미한 역할을 별 불만없이 받아들이는 심리를 자연스럽게 몸에 지니게 되었다. 만약 사람들에게 그런 심리가 미리 준비되어주지 않았더라면 현대 자본주의가 이만큼 발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은 자아를 발견하고 싶어했지만 전체에서 미리 '네가 할 일은 이거다'라고 정해주며 일종의 사명이라고 말해준다. 개인은 자각이라는 것을 해야한다는 것마저 망각하고 세뇌당한다. 분명 자신이 인생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 세뇌당한 개인은 그 일이 마치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선택이고 그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이상의 의심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전체에서 일부의 역할을 하는 자각없는 개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그들에게는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정감과 소속감이 있다. 자아를 자각하며 자유를 얻는다면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소외와 고립감만 있을 뿐이고, 아직 개인은 그것을 감당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19세기 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가 원래 독실한 기독교주의자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청년기에 기독교에 회의를 느끼고 철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청년기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신은 죽었다고 말했으니 오랜기간 니체의 정신이 축적되어 나온 말이다. 신은 죽었기 때문에 개인은 해방되었다. 신에게 얶매일 필요가 없는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전체에서 내려주는 자신의 역할따위는 벗어버리고 각자가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서 설계를 해야 한다. 모든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는 이런 개인을 '초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초인'은 자유를 되찾음과 동시에 책임을 지고 고립과 소외감 따위에 짓눌리지 않는 인간이다. 니체가 19세기 말에 이런 말을 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아를 잃어버렸지만 그것을 되찾고 싶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였을까? 개인은 조직에서의 위치도 잃어버리고, 신도 잃어버렸다. 그런데 아직은 자신을 감당할 확고한 자아가 부족했다. 자유는 개인에게 버거웠고 다시 전체에 기대어 안정감을 얻고 싶은 마음만 절실했다. 그것이 바로 나치즘의 발현이다. 극악무도했던 나치즘이 그렇게 열광적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결정적 이유는,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전체에 소속되어 그 권력에 의지하고 있는 자신들만은 안전하고 우월하다는 감정을 갖고 싶었던 민중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그럴수록 개인들의 정신은 나약해져갔으니 히틀러는 매우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개인이 전체로 도피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세가지 소개하고 있다. 권위주의, 파괴성, 자동 순응성이 그것이다. 인간이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개인적 자아에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그 자신을 융합시켜 가고자 하는 성향, 즉 상실한 일차적 관계 대신 새로운 이차적 관계를 추구하려는 성향이 바로 권위주의다. 권위주의라는 메커니즘은 복종과 지배의 심리에서 기인하는데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관계가 적당하다. 그들은 서로가 없으면 안되는 심리들이다. 마조히즘은 자신을 지배해주는 존재로 인해 안정감을 얻고, 사디즘은 자신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있음으로 인해 안정감을 얻는 심리다. 정 반대의 심리처럼 보여도 불가분의 관계, 바늘과 실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파괴성은 외부세계에 대한 무력감을, 그 세계를 파괴함으로서 해결하는 메커니즘이다. 권위주의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대상과 연대하여 같은 방향을 지향하지만 파괴성은 무조건 자신이 아닌 것은 제거해 버림으로써 소외감에서 극복한다. 무조건적인 제거는 결국 홀로 남는 고립감을 더 불러올지 몰라도 승리감은 채워준다.

자동 순응성은 얼핏보면 귄위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와 파괴성은, 외부세계의 압도적인 힘에 비하여 하찮은 자신의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의 완전성을 포기하든가 타인을 파괴하였지만, 자동 순응성은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고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변화하기 때문에 외부세계와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프롬은 이것을 동물들의 보호색과 같은 심리라고 말한다. 주위와의 구별을 어렵게 하여 자신을 보호한다.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버린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어찌보면 자기 스스로 선택한 자동인형이니 갈등도 없고 심리적 불안도 없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다. 자아의 상실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본인 스스로는 자아가 상실되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프롬이 비록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인간의 심리를 전부 부정적인 심리에서 기인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다소 우울해질수도 있다. 그러나 그도 마지막에 가서는 해결책을 살짝 제시한다. 그건 바로 자발성이다. 개인이 기꺼이 자유를 받아들이고 자발적인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할 수만 있다면 자유를 온전히 누림과 동시에 고립감이나 소외감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자아를 실현한 개인이 자신의 세계를 외부세계와 연결시키면 그는 정당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을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개이으로 느끼며, 삶의 의미는 지금까지 자아를 실현해왔던 그 방식, 사는 행위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된다.

 

자발성으로 적극적인 자유를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십수세기 동안 인류는 전체의 일부로 전락하는 삶을 살아왔고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리속에는 전체의 일부가 되어 사는 것만이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온전히 누려 자아를 실현하는 데에는 하나의 인식이 필요하다. 즉, 독자적인 개인의 자아보다 더 높은 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의 삶의 중심이며 목적이라는 것, 또 개체성의 성장과 실현은 목적 그 자체로서, 보다 큰 존엄을 가지는 것 같이 여겨지는 목표에도 결코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보다 높은 어떤 것에도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적극적인 자유를 누리고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을 포함하여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잠재력의 완전한 실현을 이룩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