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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에 대한 부정이 삶에 대한 긍정이다 : 지혜에 대한 숙고

gowooni1 2008. 12. 17. 23:07

 

 

 

지혜에 대한 숙고 (현대신서 159)

저자 장 미셸 베스니에  역자 곽노경  
출판사 동문선   발간일 2004.06.20
책소개 다양한 지혜의 길을 탐구하며 현자의 실질적인 지혜에 관해 서술한 철학이론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자이건, 그저 현재에만 머무는 삶을 사는 자이건 간에 모두 지혜에 대한 욕심은 있다. 누구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하며 설령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눈꼽만치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혜로워지고 싶은 갈망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지혜롭다는 평가를 듣는 것은 최상의 평판 중 하나이고, 그 사람의 긍지에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를 받은 사람이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외부 평판에 의해 긍지가 크게 좌우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지혜로워지고 싶고, 현명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지혜와 현명은 공부량이나 그 지식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렵다. 지혜로워지려면 공부도 해야하지만 자기 성찰도 많이 해야하고, 성품도 키워야한다. 장 미셀 베스니에가 쓴 '지혜에 대한 숙고'는 내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이라도 제시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글쎄, 저자가 내게 그런 길을 제시해주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길이 존재하는지도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내 나름의 지혜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미끼는 던져주었으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건 아니다. 그가 나름의 인생을 살면서 지혜에 대해 고찰해 온 것들을 바탕으로 자기의 사유과정을 정립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지혜는 젊은이들을 별로 사로잡지 못하는 것 같다'라는 첫문장으로 다짜고짜 시작하는 그의 사유는, 첫 부분에서는 도대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팔팔 끓어 젊음을 발산해야하는 청년들은 지혜를 거부한다며, 지혜라는 것이 마치 세상 다 산 것 같은 노인이나 속세와 연을 끊은 수도자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런가하면 현자가 되려면 아무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현자는 지혜로워지기를 포기함으로 인해 될 수 있는 존재라고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는 개입하지 말하야 하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아야하며 닥친 상황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대체 여기서 왜 도교의 무위자연적인 개념이 나오는지. 그렇다면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삶을 아무 불평없이 받아들이는 노장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현자라는 건데 이렇게까지 편협하게 현자를 정의하고 지혜의 역할을 축소해도 되는건가 싶었지만, 저자의 사유과정이 재미있는 편이기에 어디 끝까지 한 번 따라가보았다. 역시 끝까지 따라가보길 잘했다. 저자의 사상은 결론에 몰려있다. 그가 보여준 지혜의 모델은 그냥 자신이 관심 있었던 모델들이므로 한 번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란다. 실제로 자신은 자기가 보여준 모델들보다는 외부로 드러나는 지혜를 선호한다고 한다. 그게 더 건설적이고 그로인해 인류가 더 발전했기 때문이다. 지혜에 대한 태도의 근원에는 두가지의 형이상학적인 접근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세상은 완전무결하다는 입장이다. 스토아학파나 불교, 도교 같은 개념이랄까. 그래서 그저 받아들이고 해탈하고 세상에서 한발짝 물러나서 초월적인 입장을 견지하라는 것이 첫번째 접근방식이다. 두번째 접근방식은 세상은 미완성이고 혼돈으로 되어 있다는 건데,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세상은 미완성이기 때문에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인류의 지혜가 필요하며 그리하여 더 실용적인 생각들을 만들고, 이로인해 세상이 더 발전하여 인류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세네카와는 반대로 분노를 선택한다. 분노는 행동하려는 의지, 가능성의 끝까지 가보려는 용기, 마지막에 저항하며 죽어가는 용기를 일깨운다. 지혜에 대한 두번째 접근방식이 결국 지혜를 부정하는 입장이라면 기꺼이 지혜를 부정하고 지혜가 없는 세상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란다. 결국 저자의 지혜에 대한 숙고의 결과는 지혜에 대한 부정이다. 저자는 한 번도 지혜가 있는 곳에서 있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살아 있는 한 지혜는 자기가 머무르고 있는 곳에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혜라는 한 주제를 선택하여 열심히 고찰하고 설명한 결과가 지혜에 대한 부정이라니. 약간은 당혹스러워서 웃음이 나올 정도다. 그래도, 저자가 전제적으로 정의하고 들어간 지혜가 그런 초월성을 가지는 덕목이라면 나 역시 지혜에 대한 부정으로 인류를 더 건설적으로 만드는 데 한표 던지겠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장 미셀 베스니에의 사유는 나란 사람을 설득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베스니에식 지혜'는 그 사유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가 일시적으로 내린 정의일 뿐이다. 내가 굳이 저자의 지혜에 대한 정의까지 동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지혜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리지 못했고, 그래서 역시 지혜를 높게 평가하며, 아직까지도 막연히 지혜에 대해 동경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