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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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진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데뷔하던 즈음의 나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는데 상당히 보수적인 가정과 사회에서 자라던 학생이 그 당시 상당히 도발적인 곡들과 의상, 춤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그를 곱게 보기는 힘들었다. 물론 억눌린 심성을 폭발시켜주는 대리만족감 덕분에 오히려 좋아할 법도 했지만, 그렇게 억압되었다는 느낌도 별로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할지라도 대놓고 그의 팬이 될수는 없었다. 일단 내가 지내고 있는 환경이 '오빠부대'의 팬이 되도록 놔두지 않는 집이었고, 둘째로는 그가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다. 그 어린 눈에 사실 그를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외모뿐이었다. 그의 생각과 가치관을 이해하기엔 내 나이가 적었고 그의 음악성을 이해하기엔 대중음악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으며 또 관심도 없었다. 단지 그가 TV에 나왔을 때 처음 느낀 인상은 '프랑켄슈타인이다' 였다. 좀 심했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공인에게 하는 판단은 좀 냉정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냉정함이 과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고3이 되어서 대입을 준비할 때가 되어서야 그에 대한 색안경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 대한 색안경을 쓰게 된 이유도 참 단순했지만, 그걸 벗어놓는 것은 더 단순하고 어이없기까지 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박진영은 수능 100일전날 100일주酒를 마시고 99일간 공부를 해서 연세대에 합격했다'는 소문이다. 출처도 모르고 누구한테 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런 인터뷰 내용이라도 담고 있는 신문기사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단순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고3 수험생에게 유명인의 영웅담을 들먹여 '그러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심게 만들려는 루머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소문은 내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 소문 덕분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게 되었다는 효과면 참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고, '박진영=프랑켄슈타인' 이라는 내 머릿속의 공식을 '박진영=머리좋은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효과였다. 역시 후광효과란 것은 무시할 수 없다. 박진영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도 좋은데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이라는,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 가수데뷔를 했던 걸 보면 말이다. 일종의 변형된 블루오션 전략이다.
그러나 그 후광효과로도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나는 박진영이라는 가수를 좋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 싫어하거나 혐오해서 일부러 좋아하기를 기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무관심인데 지금와서 가만히 살펴보니 내가 박진영을 별로 좋아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겠다. 나는 그와 음악적 코드가 별로 맞지 않았던 것이다. 박진영의 전 곡은 물론이고, GOD, 비, 박지윤, 원더걸스 등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면 더욱 알 수 있다. 일부러 연예인 누군가를 좋아해보려고 한적은 없지만 앞으로도 그럴것이기 때문에 역시 음악인 박진영에게는 별로 메리트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상관인가. 내가 그를 좋아하건 말건 사실 나도 아무 상관없고(나는 나와 코드가 맞는 다른 가수를 좋아하면 되고), 그도 나 말고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주는 팬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말이다.
음악인으로서의 박진영에게는 그렇게나 무관심한데, 치열한 20대를 살아온 인생선배로서의 박진영에게는 상당한 호감이 가는것을 막지 못했다. 내가 별로 줏대가 없어서 그런걸까. 인생에 확고한 기준과 줏대가 있는 사람이 참 좋다. 좀 극단적이고 흔한 예이긴 한데, 살인을 하면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두 사형수 중 한 사형수는 죽기 직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며 죽었고 또 다른 사형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행동이 뭐가 나쁜지 모르겠다며 죽었다고 치자. 나는 두번째 사형수를 좀 더 지지하는 입장인데, 끝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높이 산다. 물론 사형받을 만큼 나쁜일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때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더라도 일단 하고 스스로에게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국가가 법으로 정한 규칙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말이다(생각해보니 이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 되어야 하는 일인데 왜 주객전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박진영이라는 사람을 저 두 사형수중 한 사형수로 비유해 보라고 하면 그가 후자에 더 가까운,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 신념이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 여기서, 그 소신 또는 신념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니 자잘한 것은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그저 20대의 박진영이 생각하는 것과 문제의식, 그리고 한 문제를 제기하고 계속 생각해서 나름의 해결방안 또는 결론을 내리는 그 사유 과정이 마음에 들 뿐이다. 또 모르겠다. 10년 후에 생각관이 많이 바뀐 후에는 이런 사고방식들을 더 좋아하게 될지, 아니면 매우 유치하다고 생각하게 될지. 그러나 지금은 일단 마음에 들고, 또 저자 자신이, 10년 전에 쓴 글에 대해 분명 달라진 생각관, 혹은 유치함으로 화끈거릴 부분이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지금의 자신을 만든 씨앗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며 수정없이 그대로 증보판을 찍어준 (소신있는) 자세가 또 한 번 내 마음에 든다.
책 내용을 적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행스럽게도 내용을 별로 적을 것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읽어보면 반드시 이 생각을 내 인생에도 적용시켜보고 싶다는 게 몇 구절 있다. 이 지구상에서 자신을 축으로 삼아 세상을 돌리고 있는 사람, 혹은 우주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라는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확고한 (교리 수준의) 믿음을 보다 보면 읽는 각자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멋지다는 생각은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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