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책에게 꿈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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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앞으로 살아갈 날이 2만일 정도 남아있다고 가정하고 죽는 마지막 날까지 하루 한 권 책을 읽는다고 했을 때, 고작 2만권밖에 못읽는다는 사실에 안타까웠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미 의회 도서관은 3천여만권의 장서가 있고, 가장 큰 대학 도서관인 하버드 도서관에는 1천2백여만권의 장서가 있다. 너무 어마어마한 숫자라서 감이 안온다. 이보다 훨씬 못 미치지만 우리나라 최대 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에는 2백여만권이 있고, 대학도서관중 가장 큰 서울대 중앙도서관에는 이보다 조금 못미치는 190여만권이 있다. 하다 못해 동네 공공 도서관에는 20~30만여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서 말해 보자면, 하루에 한 권씩 평생 읽는다고 해도, (고작 우리나라 최대 도서관의 1/10밖에 되지 않는)동네 도서관에 있는 책 1/10도 읽지 못한 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혼자 계산하고 파악했을 때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 수명이 한 천 년 정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천 년 정도 산다면 365000권을 읽을수 있겠고, 그러면 겨우 동네 도서관 정도는 다 섭렵한 채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좌절하던 중,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헤세를 좋아하지만 그의 문학 작품만 접했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부류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어서 신선했다. 애장하던 그림을 그린 화가를 조우한 느낌이었달까. 한없이 너그러울 것 같은 할아버지의 이미지였지만 생각보다 깐깐한 면도 있고 고집스러운 면도 있어서 인간적이었다. 작가였기 때문에 특히 책을 대하는 태도에 자신만의 고집이 문장 문장에 묻어나오는데, 그게 참 매력적이었다. 아무튼 그 책 속에서 하나의 문장을 발견했다. '.... 지금까지 내가 수천권의 책을 읽어왔지만...' 어쩌구 저쩌구. 앞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내 눈에 섬광처럼 스쳐지나간 정보란, 헤세도 고작 수 천 권의 책 밖에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 그렇게 대단한 헤르만 헤세도 1만권을 읽지 못했구나, 하고 안도했다. 좌절감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무작정 많이 읽어봤자 소용없고 깊이있는 독서를 하면 되겠다 싶어 기뻤다. 길을 찾았다.
그래도 뒤늦게 독서의 세계로 빠져든 내게 인풋은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책, 다양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질質과 양量을 동시에 신경쓰는 독서를 하고 싶다. 질質에 신경쓴다는 건, 깊이 있는 독서, 내 것으로 소화시키고 체득하려는 독서를 말하고, 양量을 신경쓴다는 건,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독서량을 만회하기 위함이다. 이전에는 왜 일찍 독서에 빠져들지 못했나 하고 후회도 했는데, 그런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뒤늦은 만큼 가치를 더 뼈저리게 느끼고 롱런(longrun)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 심적 돌파구를 보충해 줄 근거는 여럿 있지만 그 중 한가지는, 천재들은 그 재능을 지나치게 일찍 알아차리고 불꽃같이 활활 타오르다가 롱런하지 못한채 일찍 죽었다는 거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을 일시에 방출하여 천재같이 살다 죽을수도 있겠지만, 조금씩 천천히 방출하며 오래 살다 죽을수도 있다고, 어차피 내가 천재같은 삶을 영위하지 않고 있는 이상 후자의 삶을 택하여 인생 즐기고 누릴 건 다 누리고 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짧디 짧은 독서 역사를 위로하던 중, '18세, 책에게 꿈을 묻다'라는 문형범이란 89년생의 독서 리뷰를 한데 묶은 책을 읽었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KBS에서 주최하는 '도전! 골든벨'의 우승자여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가 우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을 때 놀랐다. 그 이유는 5천여권에 달하는 그의 독서 역사다. 5천권이라니! 고작 18년을 살았고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는 대한민국 입시 체제 아래 살고 있는 고등학생이 어떻게 5천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읽었을까. 한글을 깨우친 시기도 그리 이른 편은 아닌 것 같으니 10년 정도의 시간 속에서 문형범은 5천여권을 읽어치운 것이다. 참,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진정한 독서광이다. 뭐라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인간을 읽다' '감성을 읽다' '상상력을 읽다' '과거를 읽다' '만화를 읽다' '세상을 읽다' 총 6개 파트로 나눠서 그 리뷰를 정리했다.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 앞의 두 부분, '인간을 읽다'와 '감성을 읽다' 부분은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18세 소년인거 맞네, 싶어서 살짝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뒤로 가면 갈수록 5천권의 저력이 서슴없이 나온다. 특히 마지막 부분 '세상을 읽다'에서는 사회를 바라보고 분석하고 생각하는 그 깊이가 상당하고,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수준이 매우 높아서 다시 한 번 놀랐다. 5천권의 저력은 정말 무서웠다.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나보다 어린 사람을 은근히 얕보는 경향이 있었나보다. 고개를 수그리고 겸허하게 반성할 일이다. 이 책을 보면서, 사회 과학 분야에 매우 소홀했던 내 독서 경향을 반성하고 더 폭넓은 독서를 하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이런 독서방향을 잡아준 문형범이라는 어린 저자에게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지 매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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