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책세상문고고전의세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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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루소라는 이름을 한 번은 들어봤을 거다. 그리고 조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장 자크 루소라는 풀 네임을 알 것이며 그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도 어렴풋하게 기억날지 모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는 저서 '에밀'로 유명하지만 왠지 내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더 친근해서, 한 번 공략해보리라 마음 먹은지 몇 년만에 드디어 읽어내려갔다. 이 책은 프랑스의 디종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공모전 주제 '인간 사이의 불평등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에 대한 논문이다. 이미 '학예론'으로 명성을 얻은 바 있던 루소는 더 이상 명성에 대한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거리낌없이 저술해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당연히 기존 권위에 대한 반항적인 내용이었고, 수상은 커녕 박해를 받는다. 결국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프랑스에서 발간되지 못하고 루소의 조국 스위스에서 출판된다.
홉스는 '만인에 의한 투쟁상태'니 어쩌니 하며 인간은 자연상태로 놔두면 투쟁만 하니 반드시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이론의 바탕에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이 깔려있다. 그러나 루소는 이를 부인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굳이 성선설을 지지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루소는, 인간은 미개인의 상태에서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고 할 뿐이다. 1부에서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살피기 위해 인간 사회의 기원을 살펴 올라가는데, 그 내용이 너무 길어 읽는 내 입장에서는 '대체 이 미개인의 상태를 뭣 때문에 이리 길게 서술하는거야'라고 투덜거릴수 밖에 없었다. 분명 1부는 지루하다. 1부 뒤에 가서야 살짝 내비치는 인간 불평등은 바로 개별적으로 살던 인간이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뭔가 추리해낼 수 있다. '아,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으니 소유가 시작되어 불평등이 발생했다는 거군' 하고 말이다. 물론 그 말도 맞긴 한데 이보다 더 근원적인 단계가 하나 끼어있다. 그건 바로 '존경'의 감정이라는 거다.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될수밖에 없고, 강자과 약자가 비교되며 매력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비교된다. 그리고 물론 이런 개인적 장점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는데,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초의 불평등을 일으키는 근본감정이 바로 이 '존경'이라는 거다. 그리고 이 존경을 바탕으로, 존경받는 자가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는 사회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리하여 인간 불평등이 발생한다는게 루소의 생각이다.
사실, 이 책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대표적 사상이 별로 녹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정도만 읽어도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이 어떻게 발상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 이전의 상태, 즉 미개의 상태, 인간이 소유로 평가되지 않고 그 존재 자체로 평가되며 하루 하루 존재 자체로 행복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마 루소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도 알고 있고, 루소도 알고 있었겠지만 인간은 퇴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앞으로도 영영 자연으로 돌아갈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루소나 홉스나 인간에 대해 씁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면에서는 공통적이었을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불평등이 형성된 1단계가 부자와 빈자, 2단계가 강자와 약자, 3단계가 주인과 노예라고 정의해서 말하는데, 물론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왜냐면 현재 21세기에서 이 생각이 딱히 새롭다 할 것도 없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알게 모르게 무의식중에라도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루소는 18세기 사람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로 옮겨가 살았고 이 논문을 썼던 때는 한창 루이 시리즈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절대왕정시대를 평정하던 시기이다. 천부인권이고 권리장전이고 인권선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97%의 평민들은 가축과 하등 다를바 없는 삶을 살았고 또 그런 취급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더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축들은 노예적인 삶을 살기만 할 뿐이지만, 평민은 거기에다가 세금까지 더 내야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상태에서 루소라는 사람이 인간 불평등은 이러하게 기원했는데 기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평등한 상태를 재구축하려면 뒤짚어 엎고라도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가라는 것이 사실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특권을 제도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에 동조한 국민들은 어느정도 따라야하지만 그 불평등이 지나칠 경우에는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국민의 빈곤한 삶과 대비되는 왕족의 사치스런 삶을 드러내며 이런 불평등은 결국 자연법에 위배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이 논문이 어찌 그 시대 기득권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겠는가? 가히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상적 토대라고 할만한 책이다. 루소가 만약 좀 더 오래 살았거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더라면 기득권자들에게 '사회이 혼란을 야기하는 반역자'라고 하여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25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읽혀도 시대적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 사상에, 아직 인류는 그 오랜시간을 더 살았어도 딱히 발전된 사회구조를 구축하지 못했음에 씁쓸하기도 하다. 그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보면서도 느꼈던 감정이다. 불평등을 합법화함을 초월해 미화시키는 자본주의와 국경을 뛰어넘는 무한 경쟁시대를 사는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속에서 국가에 쇠사슬을 채이고 자유를 안정에 팔아버린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사실 평범한 국민에게 갑자기 절대적 평등과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한채 혼란한 삶을 영위하겠지만 인류가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 방종의 상태를 못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마치, 억압되었던 고3이 방탕한 대학생활을 조금 만끽한 후에야 정신차리고 공부를 하는 이치와 약간은 비슷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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