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앙드레 지드 : 이윤석 역 : 하서출판사 : 211p
내가 이 책을 처음 갖게 된 것이나, 그 경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세한 것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서 보통은 그런 것을 잘 생각해내는 편인데 이것은 정말 모르겠다. 게다가 스토리도 기억이 나지 않고, 감상도 좀처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그건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좁은 문]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전 사르트르를 읽으면서 그가 지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에 호기심이 일어 다시 나는 지드의 세계에 빠져보게 되었다.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 좁은 문의 개괄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단순하지만은 않은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옮긴이는 둘의 사랑을 이렇게 해석한다. 알리사에 대한 제롬의 사랑은 청순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이지만, 제롬에 대한 알리사의 사랑은 천상의 사랑이라고. 내가 해석한 것이 아니라 딱 이렇게 정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알리사가 제롬에 대해 품는 사랑을 천상의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어긋난다. 내가 생각하기에 알리사는 지나치게 청교도적이고 금욕적인, 그래서 알리사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서로가 행복할 수가 없는 불행한 사랑이다. 그녀는 제롬을 '뭔가 훨씬 훌륭한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격상시켜 버리고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정해버린다. 그리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그에게 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그의 사랑을 멀리하고 서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연민과 애틋함만을 키우다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여기서 이 소설의 제목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길은 너무도 좁은 문이어서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각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알리사의 생각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드의 생각도 겹칠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알리사는 그를 좀 더 높은 덕의 길로 보내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각자의 좁은 문을 찾는 방식의 삶을 산다. 알리사는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병으로 죽지만 병명은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극단적인 희생의 삶과, 행복한 삶과 사랑을 거부하고 살아온 그녀가 삶에 대한 애착이 없어지자 생긴 마음의 병이 몸으로 퍼져 이른 나이에 죽게 된 것이라고 나 혼자 판단했다.
왜 알리사는 그렇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녀의 삶을 대하는 방식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과 행복한 삶 중 어떤 삶이 좋을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원할 것이고 나 역시 그렇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 만약 행복하다면 그건 이미 행복한 삶이지, 그것을 추구하는 삶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삶이고 그 모습은 항상 희생하고 자신의 기쁨을 억제한 알리사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절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현세에서 많은 것을 억제하고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세상에는 60억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수 만큼 많은 삶의 모습이 있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는 그 방식을 탓할 마음은 조금도 없고, 그건 알리사처럼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믿어 지나친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택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들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행복을 추구하느라 불행한 삶을 살기보다 지금 현재 행복한 삶을 사는 방식을 택하겠다. 어쩌면 이렇게 '절대로 행복을 추구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어'라고 되뇌이며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항상 미래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걱정으로 현재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는 내 삶의 방식에 대한 부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건 조금 방식이 다를 뿐이지 알리사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전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릴 적,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알리사가 죽은 때가 굉장히 늦은 나이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현재 내 나이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조금 감회가 새로웠다고 할까. 그리고 그때는 지드의 작품이 이렇게나 흡인력이 있는 줄 몰랐는데 나도 모르게 다 읽어버렸을 때, 너무 놀라웠다. 1세기가 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시대의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대하고 사랑하고 고뇌하고 실망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다 같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대부분이 심리적 경과와 아름다운 프랑스의 정경을 묘사한 소설이기 때문에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도 다 같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번이 지드가 좋아져버렸다. 병적인 소심증을 겪었다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평도 그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는 데 한 몫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대범하게 생각할 지 알수는 없지만 나 역시 스스로 소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요즘 프랑스 소설이나 철학책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다. 한 번 다녀온 나라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굳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현재 내 심정이 이 문학에 끌리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이 기회에 프랑스어를 한 번 배워보는 것도 좋을 듯하지만 과연, 이 생각이 실천으로 옮겨지기 까지는 얼마만큼의 숙성기간이 필요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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