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구토-장 폴 사르트르

gowooni1 2008. 9. 2. 22:40

 

 

 

구토 : 장 폴 사르트르 : 김미선 역 : 청목 : 318p

 

구토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나는 내 이야기를 먼저 해야만 하겠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존재도 몰랐다. 그냥 제목만 봤으면 제목이 뭐 이래? 라고 생각하며 넘어 갔을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르트르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사르트르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 프랑스 문화와 예술이라는 강의를 들으며 파리에 대한 환상을 무럭무럭 키워 나가고 있었을 무렵, 사르트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교수님은 사르트르가 항상 책을 쓰고, 철학적 논쟁을 벌이던 카페를 사진으로 소개시켜 주었다. 나도 언젠가 저 곳에 가서 사르트르처럼 글을 썼으면, 하다 못해 일기라도 쓰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올 6월에 그 소원을 풀었다. 6월의 파리 여행 때, 여행지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아침 '셍 제르망 데 프레'의 '레 되 마고'에 가서 아침을 먹으며 글을 썼다. 내 기념할 만 한 첫 홀로 해외 여행에서 느끼는 감상 하나 하나를 빠뜨리지 않으려는 일기 기행문을 그곳에서 한시간 반 가량 쓰며 스스로 만족해 기뻐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일상으로 파묻혀 있다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도질 때에는 파리 여행 사진들을 보면서 아기를 달래듯 내 마음을 달랬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잠깐의 일탈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회상하고 겨우 마음을 추스리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의 생각이 고개들 들었다. 레 되 마고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제야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사르트르에 대해 아는 게 뭐 하나 있던가? 실존주의? 그런거 말고 또 뭐가 있지? 시몬 드 보부아르와 연인사이 였다는 것. 그런 건 누구나 다 아는 것 아니던가. 나는 사르트르의 책을 하나라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가 그렇게 말했던 실존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그가 썼다던 소설의 이름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뭐가 좋다고 '여기가 그 유명한 사르트르가 글을 쓰던 곳이구나!' 하면서 좋아했던 것일까? 이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 중의 하나인데 말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유명하다고 무조건 가보는 그런 행위. 나는 절대 그런 여행자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충분히 내가 만족할 만한 여행을 했다고 생각하고 돌아 왔는데, 와서 보니 결국 그런 사람들과 다름 없는 모습이 내 안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 행위를 정당화 시키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르트르의 책을 읽자. 나는 자신이 그런 여행자였다는 것만큼은 죽어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에 후회할 시간을 갖기 보다는 그의 책을 읽어 보는 편이 현명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읽으려고 시도한 책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였다. 제목은 일단 만만치 않다. 실존주의니 휴머니즘이니 하는 말은 21세기에 흔히 사용하는 단어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가지. 가장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계적으로 읽으면 금방 읽었겠지만 나는 이해되지 않으면 활자 위에 시선을 흘리는 짓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만뒀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사르트르가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 할 수 있었던 소설을 한편 보는게 더 나을 듯 싶었다. 그렇게 해서 사르트르의 소설을 찾게 되었고 '구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이 노벨 문학상을 거부해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책이라는 것도 알았다.

 

앙트완느 로캉탱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이 소설이 자전적 소설임을 곧바로 파악하게 해주는 인물이다. 읽으면서 줄곧 사르트르와 이미지가 겹쳤는데,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주인공의 이름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냥 누군가가 '앙트완느 씨'라거나 '로캉탱 씨'라고 말을 하면 내 뇌속에서는 곧장 '사르트르 씨'로 번역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소설을 절반을 훨씬 넘게 읽고 나서야 '아 이 주인공 이름이 앙트완느 로캉탱이었지'라고 다시 생각할 정도였다. 30살의 사르트르가 실존주의에 대한 개념을 확고히 하는 생각의 과정을 낱낱히 밝혀주는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면 비로소 그가 말하려고 하는 실존주의란 것이 이런 개념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고 그리하여 아무것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주인공의 사상 속에서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건 도무지 휴머니즘적인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쓴것도 '구토'를 출간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썼으며 본인 스스로도 사람들이 실존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제목까지 내걸었던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다. 소설속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독학자야 말로 휴머니즘적이었다. 그래서 둘은 사상적으로 충돌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소설을 쓸 당시 사르트르는 공산주의를 선호했고, 독학자 역시 사회주의자였음을 감안하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독학자의 파렴치한 행동을 아무 이유없이 감싸는 것을 보면 어느정도는 (억지스러운 감이 있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정서적으로 지극히 불안하던 주인공은 참으로 30살 답지 않다. 그러나 이 시대에 출간된 소설들 대부분이 그렇듯, 불안정한 시대속에서 우울한 생을 살아가며 삶에 대한 고찰을 깊게 하던 사람들이 주인공이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은 시대를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더라도 세계 대전 사이에 놓인 불안정한 시대의 공기 흐름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항상 내재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 불안함은 주인공의 불안한 마음을 통해서 표출되고 전달된다. 그리고 거의 한세기의 시대가 흐른 현재의 나같은 독자에게도 주인공의 불안함이, 역겨움이, 구토가 생생하게 전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