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780쪽이 넘는 엘리슨 위어의 [엘리자베스 1세]. 2주라는 시간을 들여야 읽을 수 있는 정말 어마어마한 길이의 책이다. 나중에는 이 책이 마치 정육각형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만큼 두껍고 내용이 방대하다.
하긴 그럴수 밖에 없는게 엘리자베스의 치세기간이 45년이나 되었으니 그만큼 역사도 많을 수 밖에 없겠다 싶었다.
그녀는 이렇게 오랜 치세기간동안 국민을 위해, 또 그녀 자신을 위해 충실히 살았다. 이 유명한 말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 말이 전부였을 때에는 내게 있어서 그녀는 고귀하고 신성한 영국의 절대왕정시기 최고의 여왕이었다. 내게 엘리자베스 1세의 이미지란, 일부러 독신자의 삶을 고집한 수녀같은 이미지였고, 나라를 위해 한몸 희생한 영국의 성모마리아 이미지였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삶에 대해 알고 싶었고, 그녀의 정치 스타일, 외교스타일이 궁금했다. 유럽의 극빈국 섬나라에서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해군 강대국, 유럽 최강국이 되도록 만든 그녀만의 치세 비결이 알고 싶었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나의 수녀나 성모 마리아 같은 이미지는 내 상상이 만들어낸 환상임이 판명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계승서열 1위로 당당히 왕위를 계승하여 나라를 다스렸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왕위계승서열 3위로 궁정의 찬밥신세였으며, 특히 그녀의 이복언니 메리 1세가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랬던 그녀가 왕위를 이어받았던 것은 시대의 선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녀는 억지로 왕이 되고자 음모를 꾸미거나 따로 노력을 한것이 아니라, 왕위계승서열 1,2위가 병으로 죽고 나서야 비로소 불가피하게 왕위를 계승받고 주목 받기 시작한 여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권력에 애착이 많았고, 그것을 잘 이용했다. 지력이 높았던 그녀는 정치수완도 좋았고, [아버지 헨리 8세의 딸답게] 능수능란하게 국사를 수행했다. 특히 그녀는 외교분야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그녀가 마치 남성같이 나라를 다스렸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여성임을 한껏 이용하여, 자신이 혼인시장에서 높은 가치로 평가받고 있음을 이용하여 외교에 사용했던 것이다. 한 나라와 혼인교섭이 이루어 지고 있을 때 만큼은 그 나라와의 전쟁은 보류되기 마련이다. 그 시대가 에스파냐와 프랑스 같은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항상 위협받거나 전쟁이 불가피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할때, 혼인교섭은 정말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특히 그녀는 혼인교섭에서 호락호락하지 않아 교섭을 질질 끄는데 선수였는데, 대답을 회피하고 시간을 최대한 끄는 그녀의 작전은 그녀의 우유부단한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단호하지 못하고 우유부한한 성격이 한나라의 군주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랐다.(물론 그런 행동까지 계산에 넣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식의 외교방식은 내가 생각해 온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매우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긴 평화의 시대를 유지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했던 그 시대에서 그런 자신만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한 나라를 이끌었다는 것이 멋져보이기까지 했다. 어느시대에 태어났건, 어떤 조건으로 태어났건, 그런 것을 떠나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이끌어 내어 사는 것. 그것은 여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부터 배우고 싶은 점이다. 여왕은 자신의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여 효율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다. 단순히 남자국왕 대 남자 신하사이에서는 볼 수 없는 충성섬을, 그녀는 사랑과 애정을 갈망하는 신하들에게 선을 지켜 애정을 뿌려주며 보다 든든하고 충성어린 지지기반을 구축했다. 에스파냐가 최대 위협국일 때에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와의 혼인 교섭을 질질 끌며 진행했고, 프랑스와 위협적일 때에는 프랑스 국왕의 동생 앙주 공과 혼인 교섭을 진행하여, 그 시대 가장 위협적인 강대국이 감히 잉글랜드를 쳐들어오지 못하게 심리적 바리케이트를 쳤다. 그러나 더이상 그런 교섭이 통하지 않을 때에는 해군을 증강시켜 당시 최대 강대국이었던 에스파냐를 바다에서 격추시키고, 유럽내 잉글랜드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물론 그녀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점이 존경스럽진 않다. 그녀의 남자관계나 질질 끄는 성격같은 부분은 내 기준에 별로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녀가 남자관계가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신하들이나 이웃 나라 왕과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많았고 그들과 끝도 없는 염문을 뿌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위험할 수도 있긴 하지만 쉽게 배반하지 못하고 더 끈끈한 정이 생겨 충성심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은 내게 있어 엘리자베스를 멘토화 시키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이다.
엘리자베스는 25살에 즉위하여 70살의 일기로 죽을때까지, 45년간의 긴 치세기간동안 잉글랜드 국민에게 평화와 안정을 선사했다. 국민들도 자신들의 시대에 이런 평화를 가져다 준 여왕에게 신뢰와 지지를 보내고 그녀를 숭배하기까지 했다. 여왕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훌륭한 군주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나 만큼이나 그대들을 사랑하는 왕은 없다'고. 국민들도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가 70세의 일기로 타계했을 때, 백성들은 모두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녀의 장례행렬에 울음을 터뜨리고, 제임스 1세의 등극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시대가 최고였다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죽음후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녀의 시대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한 시대를, '엘리자베스 시대'로 만들어놓고 간 그녀. 여성임을 최대한 활용한 그녀. 끝까지 '처녀 여왕'의 이미지를 지킨 그녀. 절대로 늙고 싶지 않았던 그녀. 모든 남자의 애정을 한몸에 받고 싶어했던 그녀.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최대한 누리고 간 그녀. 마법같은 말솜씨로 사람들을 경탄케 했던 그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구축하고자 했던 그녀. 이 책의 두께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녀와 2주간이나 함께 했다. 그러면서 그 2주간 나역시 엘리자베스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때때로 내가 엘리자베스가 된 착각까지 들었다. 그녀는(책은) 너무 두꺼워 내게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그녀를 추종하던 수많은 신하들이 다른 여인에게 눈길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는 내게 있어 '극히 인간적인 여인으로서 한 나라를 다스린 왕'일 뿐 결코 숭배받을 만한 '신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 16세기에 영국에 살던 시민이라면, 내게 있어 엘리자베스는 하나님을 넘어서는 경외로운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다 읽으면서, 그녀의 마지막 장례식장면을 읽으면서 내 마음도 슬펐던 것으로 미루어 볼때, 나도 그녀를 상당히 인간적으로 좋아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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