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새 차를, 그것도 내 돈으로 샀다(뭐 일부는 빚이지만 부채도 자산이려니). 새 차의 선택 기준은 첫 번째도 연비요, 두 번째도 연비, 세 번째도 연비였다. 그래서 푸조 2008과 큐엠3를 놓고 굉장히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큐엠3가 르노삼성의 서비스 망을 이용하여 유지관리가 나을 것 같고 또 공인 연비도 높기 때문에 큐엠3로 결정하였다. 계약금을 넣고 거의 한 달 동안 기다려야 했는데, 이유인 즉 큐엠3는 스페인 공장에서 다 만들어 배로 운송되는 차량이므로 그 배가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받을 도리가 없다는 거였다. 작년 12월 사전계약 1000대도 7분만에 완료되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나처럼 기다리는 사람이 많긴 많은가보다 싶었다. 외제차로 분류되어 보혐료도 저렴하지 않은 편이고, 다른 차량은 연말 프로모션을 하며 저금리나 무이자 혹은 세금 혜택까지 주는데 이건 뭐 꿋꿋이 6.5퍼센트(요즘같은 저금리 시대에!) 캐피탈 이자를 고수했다.
아무튼 그리하여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큐엠3가 도착했을 때의 감회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기뻤고, 오래토록 소중하게 아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멋진 이름을 지어주었다.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적당한 이름이 떠올랐으니 그 이름 막시무스. 라푼젤에 나온 그 백마의 이름이 맞다. 백마에 가까운 아이보리 바디에 샤프한 블랙루프, 거기다 365일 24시간 사방팔방을 감시할 2채널 블랙박스의 파란 불빛이 번쩍이는 그 모양새에 아주 걸맞는 이름이지 아니한가. 나의 막시무스를 타고 시승식도 해주고, 출퇴근도 해주고, 자주 닦아 줄 극세사 수건도 사주고, 눈이 오면 털어 줄 비도 사주고 하며 신나게 여기저기 달리다보니 처음의 조심성은 잊어버리고 어느새 예전처럼 한눈도 팔고 딴 생각도 하면서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 며칠 전, 하루 종일 정신 사나운 일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급작스러운 일이 생겼는데 꼬일대로 꼬인데다 제대로 잡기가 힘든 일이어서, 오전 나절 내내 여기 저기 전화해 실마리를 풀어 나가야 했다. 그러다보니 신경은 있는대로 날카로워지고 이 일을 꼬이게 만든 원흉이 누구인지에 대한 원망까지 한도 끝도 없이 커져 나갔다. 일을 대충 해결하고 위에 간략하게 보고를 올리고 나서도 머리가 지끈거린데다가, 별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날카로워져야 했다는 생각에 억울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저녁에는 대학원 연구실 송년회가 잡혀 있었다. 가뜩이나 심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연구실 마지막 모임이 될지도 몰라 오늘까지만 나가서 예의를 갖추자, 다짐하며 나갔다.
모임은 평소처럼 즐거웠다. 하지만 정신력이 바닥인 상태에서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것도 스트레스라 기분이나 감정이 컨트롤되지가 않는 거였다. 힘들면 바닥이어야 할 기분이 어째 조증으로 번져 들뜨기까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힘이 들어 어서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겨우 모임이 끝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막시무스의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이런 상태로 운전을 해도 될까? 싶을 정도였다. 며칠 전 읽은 인터넷 기사가 떠올랐다. 잠을 거의 안자고 하는 운전은 음주운전보다도 위험하다던데. 나는 잠을 자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마 정신력은 그만큼 바닥이라는 마음의 빨간불이 마치 경고등처럼 깜빡깜빡거렸다. 그러나 어쨌거나 집에는 가야했고 주차장에서 나와 천천히 운전하면서 차가 거의 없는 도로를 서행하며 네비게이션을 조작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차량이 도로에 거의 없었고, 나는 라디오 소리에 귀를 팔고 있었고, 한 편으로는 네비게이션을 조작했고, 거기다 시선은 길가에 서 있는 아는 사람에게 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꽝, 소리가 나며 뭔가 우직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는데, 바로 내가 아무도 없던 보도블럭을 조수석 쪽 앞바퀴로 들이받은 거였다. 갑자기 온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해서 아직 세상에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막시무스에게는 상처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크게 부서지거나 긁힌 것이 아니라서 그냥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막시무스에게 원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차주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이는 그 상처. 속이 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단 밤이 늦었으니 내일을 위해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하긴 하는데, 당장 카센터로 달려가 수리를 맡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막시무스에게도 미안했다. 차는 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기계에도 생명 비스무레 한 것이 존재해서 아껴주고 잘 길들여주고 보살펴주면 기계도 말을 잘 듣기 마련이란 말이다. 그런 막시무스에게 벌써부터 상처를 안겨주고 말았다니. 속이 쓰리고, 한 눈을 판 그 순간의 나 자신에게 너무 짜증이 나고, 마음에서 조금 있다가 가는 편이 좋다고 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운전대를 잡은 것도 후회스러웠다.
짜증스럽게 헤어 드라이기를 잡고 머리를 말리는데, 갑자기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상황은 벌어진 거고, 차의 깨진 부분은 돈 좀 들여 바꾸면 되는 부분이고, 후회해봤자 내 속만 아프고, 지금은 마음 편히 자는 게 내일을 위해서도 현명하고, 또 어떻게 보면 인명 사고 같은 큰 사고도 아니었고, 이렇게 경미한 사건으로 인해 경각심을 확실하게 얻을 수 있었고, 내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도 깨달았고, 다음부터는 직관이 이끄는대로 행동을 해야 후회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았고, 무엇보다 하루종일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는 상태로 마음의 평상심을 빨리 되찾지 못한 것도 잘못이었고, 덕분에 어떤 일이 있어도 늘 마음은 고요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것도 알았다. 이렇게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면 오늘의 이 작은 사건은 오히려 사소한 대가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면 막시무스의 깨진 부분을 굳이 고치려 들지 않아도 될 것도 같았다. 딱 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다행이긴 하지만, 그 부분을 끊임없이 보면서 이번에 얻은 깨달음들을 되새기고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대신, 그 부분을 보완할만큼 막시무스를 더욱 아껴주고 조심히 운전해야겠지만. 아니, 매사에 조심하고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는 거다. 그게 핵심.
'소소한 일상-Daily > 일상-생각-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항가는 중 (0) | 2015.05.11 |
---|---|
허니버터칩 일기 (0) | 2015.05.06 |
베어스타운 - 폭설 속 스킹 (0) | 2014.12.20 |
내 삶의 모양새가 마음에 드는 즐거움 (0) | 2014.12.20 |
먹을 것, 못 먹을 것 (0) | 2014.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