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나날에 정신이 어수선하고 혼미하여 현실을 도피하고 싶을 땐 소설이 최고다. 가격도 착하고 시간도 별로 안 들고 기분전환 확실하고. 게다가 책에 대한 어느 정도의 취향만 있으면, 어떤 종류의 분위기가 그리울 때 어떤 부류의 책을 선택하면 좋을지도 비교적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번에 고른 소설의 분위기 조건은 이러했다. 조용하고 잔잔할 것. 소소하고 일상적일 것, 그 안에서 범사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그런 면에서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은 딱이다. 일단 도입부 부터 마음에 들었다. 스토리는 다카코라는 약간은 흐리멍덩하고 어중간한 성격의 여자애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한다. 다카코는 도쿄에서 회사를 다니며 멋진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었다. 그 멋진 남친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 중 폭탄 발언을 듣는다. 남자친구가 내년에 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그 상대는 분명 다카코가 아니며,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다른 여성이라는 거다. 흐물흐물한 성격인지라 뭐라고 크게 대꾸도 못하고, 어 잘 됐네, 라고 말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폭풍 눈물을 쏟아내다 결국 2주 후엔 사표까지 내고 은둔 생활 모드로 돌입한다.
그러던 와중 외삼촌 사토루로부터 전화가 온다. 진보초에 있는 헌책방 거리에서 모리사키 서점이라는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사토루는 다카코에게 서점 일 좀 거들면서 머물지 않겠냐고 제안을 한다. 다카코는 원래부터 사토루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사토루라는 외삼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성격에 늘 방방 떠 있는 듯한 분위기여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극도로 마이페이스인 성격. 이번에도 사토루는 다카코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어이없어 하면서도 다카코는 결국 모리사키 서점에서 머물게 된다.
원래 책과 담을 쌓고 살아왔기 때문에 다카코에게는 진보초 헌책방 거리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헌책방의 곰팡내도 별로 달갑지 않다. 그러나 일단 머물 곳은 필요했고 딱히 할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씩 모리사키 서점의 분위기에 익숙해진다.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던 사토루와 계속 얼굴을 보고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털어놔야 하는 부분도 생기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이별의 아픔도 잊어가는 것 같고, 주변 카페의 거리에서 친한 사람들도 생긴다. 그러던 어느날, 잊어가는 옛 남친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오고, 그 메시지를 들은 다카코는 크게 동요한다. 깔끔하게 잊어버린줄 알았는데, 목소리 한 번에 기분이 좌우되는 걸 느끼며 다카코는 자신이 아직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카코의 기분상태는 사토루에게도 전해지고, 결국 그녀는 외삼촌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터놓고 얘기한다. 열받은 사토루는 당장 그 남친에게로 달려가 사과를 받아내자고 하고, 술도 마셨겠다, 둘은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 기습을 받은 옛 남친은 어이없어 하며 사과는 고사하고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며 나가라 하지만, 맥없이 물러섰던 예전과 달리 다카코는 자신안에 담겨져 있던 말을 내 뱉고 돌아선다.
어라, 이런 어설픈 복수로 이야기가 끝나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실망하면 이르다. 이보다 더 큰 스토리가 뒤에 2부로 따라온다. 어째 이 소설의 분위기가 좋아지려고 하는데, 이대로 끝나는 건가 하고 아쉬울만한 타이밍에 외삼촌의 집 나간 와이프 모모코가 등장한다. 새로운 인물의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 조근조근 들려주는 이야기,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은 가슴이 꽤 훈훈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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