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중독-Reading/문학*문사철300

도토리 자매

gowooni1 2014. 4. 1. 23:05

 

 

 

성취지향적인 내 주변엔 어쩐지 성취에 시니컬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게 정상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하나 뿐인 딸을 시골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도시의 학원이나 과외 같은 것에서 자유로이 풀어주며 키우고 있었다. 내가 이제 슬슬 도시로 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좋은 학교에 들어가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정작 부모인 그녀 왈, 자신의 아이는 시골 아이라서 너무 잘 나가는 학교에 굳이 입학하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사람은 타고난 대로 어울리는 곳에 있어야지 억지로 따라가려 하면 안된단다. 뱁새가 괜히 황새 따라가다 다리 찢어지느니 차라리 적당한 곳에서 적당하게 스트레스만 안 받고 자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그와 대조적으로 내가 너무 성취지향적이며 그것만이 옳다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조금 지쳤다는 기분이 든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야하는 거지? 왜 괜히 화를 내고 분노를 해서 스스로를 닥달하고 괴롭히는 거지?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척을 하며,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내가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도 못하고 있는 거지? 왜 각을 세우고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모든 것에 완벽하려 드는가. 아무리 적당한 스트레스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과하면 좋지 않잖아.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경직된 얼굴 근육을 완화하고, 미간에 준 인상도 풀어주고, 눈매를 조금 더 부드럽게 하고 세상을 바라보아도 좀 더 살기가 편안해지는 데 말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이런 기분을 주는 일종의 힐링 소설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다보면 주인공의 심리상태에 싱크로 되면서 슬슬 긴장이 완화된다. 주인공의 생각관에 동화되면서 세상사에 좀 더 초연해진다. 인생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지만 기왕 태어났으니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주인공들, 그렇다고 너무 열심히 살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신에게 맞는 속도에 맞춰 살며 조바심 내지 않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주위 사람들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가치관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진실된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들이 그려진다. 그런 소박하고 작은 일상적인 행동들 하나하나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나도 그런 속도에 익숙해져서 어쩐지 느긋함 속의 소소한 행복을 놓쳐버리고 사는 것이 정말로 큰 손해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대부분이 연애소설, 그것도 거의 불륜을 소재로 한 것이라 흥미 위주라는 인상을 주는 반면에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힐링소설, 가족소설 같다. 물론 바나나의 작품에도 불륜은 가끔씩 등장한다. 그러나 바나나의 소설에선 연애 혹은 불륜 그 자체가 메인 이야기는 아니고, 그보다는 그 주변 사람들의 관계, 그들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1인칭 시점으로 마치 일기처럼 기록되는게 특징이다. 그래서 바나나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녀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생각이나 느낀점들이 자주 포착되고, 그래서 소설이면서도 진실성이라는 감정을 독자에게 준다.

 

'도토리 자매'는 주인공들의 컨셉이다. 언니 이름이 돈코, 동생 이름이 구리코 라고 해서 도토리 자매가 되어버린 자매가(일본어로 도토리는 돈구리)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세상 살다 지치거나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메일을 보내오면 거기에 답장을 해주는 식으로 살아간다. 답장은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해결책을 찾아주려 노력하는 식으로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그 고민을 아는 사람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딱히 해결책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두서없이 넉두리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다. 그걸 받아주며 두서없이 온 메일들에 두서없는 답메일을 쓴다. 그런식으로 세상과의 자그마한 연결점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조금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게 도토리 자매가 탄생한 배경이다.

 

'도토리 자매' 역시 기존 바나나의 작품 냄새가 짙게 나는 소설이다. 조금 색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한국 음식 이야기도 나오고,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도 종종 등장한다. 한국 드라마, 한류 열풍, 한국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 걸 봐서 어라, 어쩐지 이번엔 바나나가 한국 독자에게 호감이라도 살 요량으로 작정하고 썼나? 하는 의심도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색이 바래는 것도 아니고 또 워낙에 작가가 전 세계 다양한 국가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타입인지라 일부러 작정하고 썼다는 의심을 하며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이번에도 조용한 곳 푹신한 쇼파에 몸을 파묻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와 사람들의 가치관에 휘둘리다 지친 시간들을 뒤로한 채, 요시모토 바나나 식 세상살이 속도에 리듬을 타며 자신을 풀어주고 보듬어 줄 요량으로 읽으면 된다. 그러면 힐링 효과를 제대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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