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반응하는 능력

gowooni1 2013. 10. 25. 12:34

 

 

 

점심으로 요기나 떼울까 싶어 작은 국수집에 들어갔다. 할머니 두 분이 하는 것치고 깨끗한 집이다. 국수가 시킨지 10분 가까이 되어 나온다는 문제가 좀 있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하여 가끔 들른다. 평소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근처 음식점이 문을 많이 닫아서 그런지 작은 공간에 사람이 제법 차 있었다. 벽쪽을 바라보며 먹는 자리 말고는 구석자리 테이블밖에 남지 않아 그쪽으로 자리를 잡고 국수를 하나 시켰다.

 

사실 그 테이블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중앙에 사람이 않을 수 있는 빈 테이블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옆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여자들이 각자의 기타케이스를 빈 테이블 의자 두 개에 걸쳐 놓고 모른척 하고 있었다. 그러니 테이블만 비었지 네 개의 의자가 기타 케이스로 꽉 찬 셈이다. 내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사람이 더 식당에 들어왔고 그 역시 그 테이블에 앉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여자들이 기타 케이스를 치워줄 눈치가 전혀 없자 비좁은 벽쪽 테이블에 벽을 보고 앉았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들어왔는데 벽쪽 테이블의 비좁은 한 자리에 아까의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을 것인가 그 테이블에 앉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역시 여자들이 모른척 하고 있자 그냥 벽쪽에 남은 테이블에 앉았다.

 

이쯤 되니 나는 그녀들의 뻔뻔함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인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10평 안되어 보이는 좁은 국수집에서 단 둘이 중앙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앉아서는, 사람들의 불편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본 영화에 대하여 감독의 의도와 카메라의 반영 따위 등을 토론하며 마음 편히 점심 한 끼 해결하러 홀로 들어온 사람들의 귀까지 오염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들의 소음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아 귀를 막고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이내 또 다른 남자가 한 명 들어와서는 그녀들이 점령한 빈테이블 앞에 서서 그녀들이 비켜줄때까지 별 말 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여자들은 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자신들의 기타케이스를 들고 일어섰다.

 

그녀들이 막 나가려고 할 때, 내가 들어온 이후 다음 다음으로 들어왔던 나이 지긋한 남자가,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벽쪽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뒤돌아 앉아 그녀들에게 무슨 기타를 치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무슨 기타였다고 그녀들이 말한 것 같기는 한데, 나는 그것보다 남자의 반응에 내심 놀랐다. 나는 그녀들의 뻔뻔함에 눈살이 찌푸려져 빨리 나가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남자는 어떻게 보면 자신이 그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더 피해를 받은 사람(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시각에서지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뻔뻔함에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을 했다. 결국 그녀들의 뻔뻔함에 신경질이 난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일을 하다 무척이나 바쁘고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었는데, 그 일의 발생 원인은 대충 이러했다. 업무분장을 제대로 하지 않은 팀장이 혼자 이리뛰고 저리뛰며 머리를 쓰지 않은채 몸 만으로 바쁘게 일을 하다가 자신이 더이상 그 부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팀원들을 내팽개치고 나몰라라 도망을 간 것이다. 우리 남아있는 팀원들은 뒷처리를 하느라 고생을 했고 팀장의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행동에 화가 났다. 그런데 팀장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팀원 4명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두 명은 팀장이 저러하니 굳이 우리도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 하며 뒷짐을 져버렸고 한 명은 팀장을 이해하려 들며 업무를 자신이 좀 나눠받아야 겠다고 말했다. 나 역시 팀장이 맡은 일 중 일부를 맡겠다고 직접 나섰지만, 나의 행동은 팀장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팀장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우리가 해결해야 했던 어이없는 상황을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그러면서도 팀장에 대한 화가 가시지 않아 친한 사람들 몇몇한테 그 상황을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니까 험담을 했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그 상황에 지나치게 감정을 휘둘리는 느낌을 받아 영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영화 그래비티를 보면 산드라 블록이 우주공간 속에서 중국 위성 셴조 측에 연락을 취하면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SOS를 청한다. 그쪽에서 구해주지 않으면 산드라 블록은 우주에서 꼼짝없이 죽고말 상태. 그러나 셴조 측에서 오는 응답은 산드라 블록의 급박함과 상관없다. 술에 취했는지 어찌된 건지 딴소리만 하며 그녀의 SOS를 무시하고, 지구에서 들려오는 강아지 소리만 들려주는데, 이때 산드라 블록은 나의 상식과는 전혀 상반되는 반응을 보인다. 개의 소리가 들리니 좋다고, 자신은 오늘 여기서 죽을 거지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거라고 하며 스스로 산소수치를 낮추고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나는 그 부근에서, '아니 대체 왜 욕을 하고 소리지르며 구해달라고 외치지 않는거지? 자신의 급박함을 상대에게 전해야 하는게 우선순위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반응이 무서워졌다. 자신이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조차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절대적으로 침착하고 중립적, 하다못해 이해하지 못할만큼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그녀의 반응이 무섭도록 고차원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나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를 분명 구해줄 수 있는데 직무태만으로 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를 원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살면서 몇 안되니까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 아닌 대부분의 일상생활에서, 국수집 여자들이 보인 뻔뻔함과 팀장이 보였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는 그래도 그 정도 수준의 반응을 보일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타인에게 끼치는 부정적인 감정에 똑같이 부정적으로 대응해버리고 말면 나의 감정 컨트롤 능력을 상대에게 전임하고 마는 것이다. 나의 감정 제어 주도권은 내가 남에게 주지 않는 이상 내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건데, 가끔씩 문득 깨달으면서도 여전히 컨트롤을 잘 못하는 것은 아직 세상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이유 때문일수도 있고 너무 생각과 반성없이 시간만 축내고 살아서 일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