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Daily/일상-생각-잡담

상실과 공허의 시대

gowooni1 2013. 2. 18. 23:27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밤 중에 온 몸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어나 거울로 전신을 비춰보니 상태가 영 심각했다. 기분도 썩 좋지 않은데다 몸 상태도 어찌 나른하고, 곧장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할 일이 꽤 쌓여 있어 일단 아침에 출근을 했다. 출근하자마자 급한 일부터 대충 처리해놓고 근처 피부과에 들러 약처방을 받아 점심 식사 후 먹었는데 이게 오히려 몸과 맞지 않았는지 괜찮았던 목주변과 얼굴까지 온통 새빨갛게 올라오는 바람에 급히 병가를 쓰고 퇴근, 다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의사 말이 더 웃기다. 두드러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할지라도 사람은 살면서 체질이 변하기 때문에 한 번 이러기 시작했으면 앞으로도 종종 그럴 것이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온 몸이 가려운데다 하도 기운도 없고 해서 그냥 말았다. 찬바람을 쐬면 많이 가라앉을 거라기에 추워 죽겠는데 일부러 바깥으로 돌아다녔다. 기왕 모처럼 쉬게 되었으니 백화점도 돌아다니고 교보문고에 들러 책도 실컷 읽고 빌딩 사이 매서운 바람을 온 몸으로 쐬며 몇 시간을 돌아다녔는데 그게 더 무리가 되었던 것 같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고 으슬으슬 추워서 들어간 커피빈에서 핫초코를 한 잔 시켜 마시며 전신유리가 난 2층 창가에 잠깐 앉아있는다는게 깜빡 잠이 들었다. 몸 컨디션과 기분이 안 좋다고 계속 생각해서 그런가 마음이 쉬이 약해져서, 아 이러다 그냥 이유도 없는 병에 걸리고 기운빠져 죽어버리는 수도 있겠구나, 라는 묘한 감상에 사로잡히다 잠에서 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쵸코가 죽었단다.

 

태어난 지 한 달 되지 않아 데려온 쵸코는 대략 만으로 6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개 목숨을 개 목숨으로 아는 엄마의 개 시신 처리에 넌덜머리가 난 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엔 좀 심했다. 그래도 쵸코가 아닌가.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버틴 개이자 엄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강아지란 말이다.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당혹감을 애써 차분히 감추고 제대로 된 시신 처리에 나섰다. 벌써 바깥으로 내다버린 쵸코의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몸뚱아리를 수습해 상자에 넣었다. 눈이 온전히 감기지 않아 반쯤 떠진 눈이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아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도 울어 퉁퉁 부은 얼굴로 데리고 근처 다니던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일찍 문을 닫아버려서 다시 택시를 타고 문을 연 동물병원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몇 블록 지나지 않은 거리에 문을 연 동물병원을 발견하고 황급히 들어가 쵸코가 든 상자를 들이밀었다. 수의사는 동물병원 원장님답게 다정하고 온화한 말투를 가졌지만 강아지의 상태를 냉정하게 살피며 상냥하게 말했다. 이미 죽은지 꽤 지난 것 같은데 처리를 하러 오신 건가요? 글쎄, 희망을 가지고 왔다고 하면 나 역시 희망을 버렸었으니 거짓이겠지만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치니 오히려 슬프도록 냉철해져야했다. 수의사는 강아지가 죽은 원인을 대략적으로 진단했다. 온 몸에 있는 임파선이 있는대로 다 부어 있네요, 이 정도면 평소에 많이 무기력했을텐데, 모르셨어요? 워낙에 얌전한 강아지라 그게 무기력한건지 얌전하게 지내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이 정도면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져 있는 상태에요, 거의 인간으로 치자면 백혈병 말기라고 보면 되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어째서 기르던 개가 죽으면 상을 치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휴가가 없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개인적 슬픔에 억눌려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회는 냉정한 판단을 내리므로 너무 슬픔에 얽매여 있어도 좋지 않을 것이라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후에 가까이 지내는 사람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개가 죽었다고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이 제법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나의 슬픔에 공감해주려는 의사를 표시하기에 그만 이렇게 넉두리를 늘어놓고 말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슬퍼도 마음껏 슬퍼할 수 없고, 거기에 너무 매몰되어서도 안되고, 해야할 일은 너무나 많고, 마음속으로 혼자 괴로움과 상실감과 공허감을 안은채 살아가야 하는 거잖아요, 살면 살수록 이런 상실감이 더 많아질거고 그럼 감내해야 할 슬픔도 점점 더 많아질텐데, 다들 그렇게 일부러 무뎌져가며 견뎌야 하잖아요. 그랬더니 그 사람 왈, 글 쓰냐?

 

역시, 넋두리는 혼자 풀어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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