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68년. 미국에서나 유럽에서나 흑인 인권에 대한 문제가 유난한 시대의 일이다. 로맹 가리는 아내 진 세버그의 영화 촬영 때 같이 있으려고 베버리힐스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작가에게는 멋진 샌디라는 이름의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워낙 풀어놓고 키우는 개라 하루 이틀은 들어오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는데 며칠동안이나 계속 안들어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을 하던 차에 드디어 샌디가 돌아왔는데 친구랑 함께였다. 회색 빛이 도는 셰퍼트 한마리. 가리는 직감한다. 개들이 우정을 보이는 것은 흔히 믿을만한 녀석이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별 의심 없이 그 개를 일단 거두어들이고 한동안 주인이 나타나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역시 개는 믿을만했다. 충직하고 사람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이며 순종적이고 똑똑했다. 마음에 너무나 들어서 웬만하면 주인이 나타나지 않길 바랄 정도였다. 그러던 개가 갑자기 그의 수영장을 청소하러 온 인부를 보더니 물어 죽일듯 적의를 보이며 미친듯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가리는 깜짝 놀람과 동시에 그 인부의 슬픈 표정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짐승이 그토록 순수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인간의 표정을 처음으로 여과없이 봤기 때문이다. 개의 순수한 적의는 가리에게 순수한 배반감을 안겨주었는데 다음 날 우편배달부에게 또 그와 같은 적의를 보이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그 개는 바로 '흰 개'였던 것이다. 흑인만 보면 공격적으로 돌변해 물어 뜯어 죽이도록 훈련된 경찰견 말이다.
미국 남부에서는 아직도 흑인을 노예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고 백인 지주 집안에서는 흑인이 안주인을 강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흰 개'를 구해다 키우곤 했다. '흰 개'가 있음으로서 바깥 주인은 안주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일을 할 수 있었고 백인 가족들은 흑인들의 분노에 별 영향없이 맘 편히 잘 수 있었다. 어떤 경위에서 흰 개 바트카(러시아 어로 노인이란 뜻)가 풀어져서 자신의 집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개를 가만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아내 진 세버그는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 선 백인 중 한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그의 베버리힐스 집에는 수많은 흑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었다. 그런 흑인들 사이에 바트카를 풀어놓는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가리는 바트카를 데리고 주변에 있는 개 사육장에 맡기기로 했는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었다. 그 사육장에는 주인이 도저히 해고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흑인 사육사가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바트카는 키스가 주는 음식엔 입도 대지 않고 쫄쫄 굶으며, 그가 사육장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물어 죽일듯 이를 드러내 살기를 내보였다. 가리는 키스가 있는 곳에 바트카를 버려둘 수 없다며 다시 데려오려 하지만 사실 다시 데려온다 해도 개를 마음 편히 둘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게다가 무슨 작심에서인지 키스도 그런 바트카에게 집착을 보이며 자신에게 개를 달라고 말한다. 가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일단 키스에게 바트카를 맡기고 바쁜 자신의 일상에 몰입한다. 로맹 가리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데다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백인과 흑인, 심지어 FBI의 협박까지 받는 유명한 배우 아내로 둔 자로서 너무나 바쁜 사람이었다.
소설은 흰 개가 가리의 인생에 끼어든 것을 시작으로 전개되지만 이건 작은 계기일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흑인 인권 문제로 미대륙과 유럽,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들끓던 엄청난 분노와 증오, 갈등과 폭력, 테러와 각종 운동의 1960년대 말 상황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태생이 소수자라고 생각하는 그는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가차없이 폭력과 폭언을 쏟아붓는 다혈 기질로 여기 저기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으로 그가 자신의 흰 개를 보려고 사육장으로 갔을 때, 바트카와 키스는 보이지 않았다. 백인 친구 하나와 물어 물어 키스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바트카의 맹렬한 공격을 당한다. 키스는 흰 개를 검은 개로 바꾸어 놓는 것으로써 백인에 대한 승리를 쟁취했다. 바트카는 이제 백인만 보면 물어 뜯는 개로 변해버렸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뒤늦게 가리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채 집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며 집에 돌아온 작가는 한 참의 거리를 뛰어 온 바트카가 집 앞에 쓰러져 죽어 있는 걸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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