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 관람 시간은 일곱 시, 빅 오 쇼 관람 시간은 밤 아홉시 반. 그걸 보게 되면 우리는 여수까지 와서 제대로 된 회 한 접시 제대로 못 먹고 올라가게 될 것임이므로 엑스포 재입장 1회의 권리를 사용하여 잠깐 밖에 나갔다 오기로 했다. 역시 공짜 버스를 타고 이순신 광장 앞에 있는 수산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나로서는 회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두 혜들은 회를 한 입 물었을 때 입 안 가득 퍼지는 싱싱함과 활력을 느끼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나를 측은해할 정도인 회 매니아다. 이순신 광장에서 내려 연안 여객터미널 앞에 즐비한 건어물 시장을 지나 수산 시장 건물로 가니 대한민국 수산 시장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들이 연출되는 중이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나는 회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별로 없어서 보이는 거라고는 멍게, 해삼, 광어, 우럭, 돔 정도. 가장 만만한 횟감은 역시 광어와 우럭. 그렇다 쳐도 여기 광어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젊고 날씬하고 예쁜 여주인이 그물로 튼실한 광어 한 마리를 올려 파닥이는 녀석의 목을 칼로 내리칠 때, 그 참혹한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도마 주위로 뭔가가 둘러싸여 있었지만 차마 거기에서 튀어나오는 빨간 액체마저 감추지는 못해서 나는 그만 눈을 질끔 감고 말았다. (회 맛은, 그냥 회 맛이었다. 싱싱하긴 했다.) 회를 먹고 매운탕을 먹는 와중에도 이제 셋 다 지쳐버려서 열심히 에너지 보충하는데 전념했다.
엑스포장에서 나올 때 손 등에 찍었던 보랏빛 잉크의 재입장 도장이 거의 지워지긴 했지만 들어오는 데 별 문제는 없었다. 아쿠아리움까지 시간이 남아 산처럼 부른 배를 부여잡고 산책이나 할 겸 해 떨어진 저녁의 엑스포장을 어슬렁 돌아다니고 있는데 어디서 라이브 관현악단 소리가 들려온다. 음원을 찾아 가보니 바이올린 몇 대, 첼로 한 대, 콘트라베이스 한 대 등등 총 10명 안으로 구성된 관현악단이 어떤 멜로디를 느릿느릿 클래식하게 연주하는 중이었다. 처음엔 대체 이게 무슨 곡인가 싶어 가만 귀 기울여 들어보니 다름 아닌 아리랑. 뭐야, 아리랑을 한 번에 못 알아듣게 연주하는 아마추어인가. 그래도 듣기는 좋다. 악단의 구성 멤버가 관록있는 지긋한 나이에서부터 아직 학생티 역력한 어린 아이들까지 다양했고 가끔 삑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아마 내 짐작이 맞은 듯 했지만 이런 곳에서 듣는 약간 미숙한 음악은 웬만해선 낭만적이고, 소박하게 도회적이고, 색깔이 넘치듯 예뻐서 마음이 아름다워질 수밖에. 갑자기 오드리 헵번이 불렀던 문 리버가 미치도록 듣고 싶었지만 악단에 신청곡을 넣을 수는 없었으므로 콧소리로 흥얼거리며 아쿠아리움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드디어 대망의 아쿠아리움이다. 그런데 웬걸. 대기줄이 어림잡아 삼백 미터는 되는 것 같다. 뭐야, 이래서 7시에 입장 가능할까. 시간도 많으니까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아까 대낮부터 유혹하던 터키 아이스크림이 강력한 힘으로 날 끌어들인다. 먹을까 말까. 알 수 없는 맛은 상상력의 힘을 빌려 더욱 유혹적이다. 고작 아이스크림 가지고 꼭 찰떡을 치듯 아이스크림을 덩어리째 들었다가 패대기치고, 당당하게 돈을 내고 주문한 손님한테 줄랑말랑 희롱하는 거만한 터키 아이스크림 바리스타들의 시종일관 웃는, 장난끼 가득하고 잘생긴 얼굴도 유혹하는 힘 중 하나다. 배가 부르므로 아쿠아리움을 다 보고 먹어야지, 다짐하는데 아까부터 뒤에서 알짱알짱 하는 어린 커플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여자 쪽이 특히 안하무인이었는데, 자신의 피곤함을 노골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표출하고 콩깍지가 잔뜩 쓰인 남자는 그녀의 짜증을 그저 귀여운 어리광으로만 받아들여 주위를 더욱 피곤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결국 남자는 여자의 짜증을 달래기 위해 긴 줄을 빠져나가 터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달려왔는데, 내 거슬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맛있어?"
"웅, 맛있어. 아이스크림이 쫀득쫀득해."
"오빠가 이거 사는데, 완전 농락당했잖아."
"왜?"
"그 아이스크림 파는 남자가 자꾸 줬다 뺐었다 하는데, 얼굴 빨개졌어."
"꺄르르. 그 사람들 꼭 그렇더라. 오빠도 먹어봐. 여기."
"웅, 음. 맛있네. 진짜 쫀득쫀득하다."
"그치?"
"이게 우유가 많이 들어가서 그렇대. 맛있지, 맛있지?"
"웅, 오빠 최고."
거슬림 하나. 나도 먹고 싶은데 저들은 벌써 먹고 있다. 거슬림 둘. 정말 아이스크림의 쫀득쫀득함이 우유가 많이 들어가서인가?(내가 봤을 땐 그냥 같다 붙이는 것 같은데. 나중에 꼭 검색해봐야지.) 거슬림 셋. 고작 아이스크림 하나 가지고 굉장히 연극스럽다. 짜증쟁이 여자는 삼 천원 짜리 아이스크림 하나 달려 나가 사온 남자를 마치 엄청난 영웅으로 대우해주는데(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마치 목숨을 들여 힘들게 구해온 오딧세우스처럼), 어디서 벤치마킹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남자를 띄워주는 능력 하나는 탁월하다.(오오, 저런 건 거슬리긴 하지만 배워둬야 한다)
아쿠아리움과 빅오쇼는 음, 볼만했다 정도로만 그쳐두겠다. 핵심은 늘 장막에 둘러싸여 있어야 있어 보이는 법이다.(어쨌든 아쿠아리움에서 나와 터키 아이스크림은 사 먹었다. 쫀득쫀득한 건 인정. 혜투의 말을 빌리자면 '뭐야, 이거 그냥 고깃집에서 후식으로 주는 아이스크림이잖아')
셋째날.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틀 자고 나니 이것도 나름 적응이 된다. 모처럼 수학여행 온 기분을 만끽하고 역시 같은 메뉴인 토스트에 커피를 한 잔씩 마신 다음 밖으로 나왔다. 돌아가는 기차 출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서 택시를 타고 근처 해수욕장에 들러보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곳이 만성리 해수욕장이었는데, 당최 여수 택시 기사님들은 죄다 친절한 모양이다. 어제 엑스포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택시 아저씨도 그렇고 이 아저씨도 그렇다. 만성리까지 가는 길에 있는 마래 터널의 유래도 자청해서 들려주고, 만성리 해수욕장은 검은 모래로 유명한데, 방파제가 생긴 이후 자연적으로 검은 모래가 소실중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기본요금에서 조금 더 나온 정도로 만성리는 여수 엑스포역에서 가깝다.
죽 느낀 거지만, 정말 자원봉사자들 많다. 엑스포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다 사람도 별로 없는 이 만성리 해수욕장 입구에도 자원봉사 잠바를 입은 사람들 예닐곱명이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죽치고 앉아 있다. 시내에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좀 다른 건, 친절도 문제다. 친절한 사람은 시내로, 서비스 정신이 좀 떨어지는 사람은 외곽으로 배치했나?(그래도 알려줄 건 다 알려준다.) 정오가 되지 않은 만성리 해수욕장의 너른 바다와 그 앞으로 펼쳐진 모래사장은 깨끗하고 하얀 것이 다른 오염되지 않은 해수욕장과 다를 게 별로 없어 보인다. 파도가 들고 나는 해변가로 가까이 가니 겨우 검은 모래가 보이긴 하지만 완전 검다기 보단 흰색과 섞여 차라리 검회색에 가깝다. 근처 매점에서 맥주와 오징어를 사다가 짚으로 엮어 만든 파라솔(아직 개장을 하지 않아 자리세를 받지 않는다) 그늘에 앉아 마시며 먹으며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멀리서 스킨헤드의 깡마른 외국인이 갑자기 뙤약볕 내리쬐는 모래사장 한가운데로 등장하더니 윗도리 아래 바지 훌렁 벗고 사각 팬츠 차림으로 아직은 차가울 파란 바다에 거침없이 들어가 수영을 즐긴다. 마른 정도가 마치 세상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업으로 삼는 요기처럼 보인다. 다들 저 나름대로 인생과 자유를 즐기며 살아간다. 음, 좋다.
올라오는 무궁화호는 또 다시 다섯 시간이 걸릴 예정이다. 어제 잠을 푹 자놔서 그런지 별로 졸립지는 않고, 나는 다시 귀에 이어폰을 꽂은 다음 버스커버스커 노래를 들으며 제왕의 문 남은 부분을 읽기 위해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쳤다. 만주벌판으로 날아간 작가는 드디어 #부호의 비밀을 풀어낸다. 고구려 고위 귀족으로 여겨지는 모두루의 무덤 모두루총에서 광개토왕은 자신을 물의 신 하백의 손자라고 지칭하는데, 그건 자신을 건국신화의 주몽과 일체화 시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건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물의 기원인 우물을 상징하는 우물 정자의 변형으로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상징으로 기호화 시켰다는 얘기란 것이다. 어느 학자가 #부호를 단지 여백을 메우기 위한 아무 뜻없는 기호일 뿐으로 여겼던 것과 달리, #부호는 광개토지호태왕이 세운 기업(나라)의 로고였던 것이다. 정삼각형 두개를 상하로 겹쳐 별모양을 만든 이스라엘 다윗처럼. #부호가 새겨진 유물은 만주와 우리나라 전역을 지나 일본에서도 발굴되었던 사실을 미루어볼 때, 5세기 광개토대왕의 세력은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마치 붐처럼 퍼진 모양이다. #부호의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어느 누구도 동감해주지 않는 과업을 고군분투하며 싸워온 작가의 집념에도 감탄하지만 과연 이 책이 중국에서 전면 출판금지될 만 했다고도 감탄하는 중, 기차는 종착지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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