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씻는게 좀 불편하고 방음이 좀 안 되고 사람들이 많아 북적북적 떠들고 문을 들락날락 거리며 쿵쾅거리는 것 빼고는 게스트하우스는 잘 만한 곳이다. 물론 엑스포 특수 가격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 아침에 제공되는 딸기잼 바른 토스트와 드립 커피가 맛이 있어서 이 돗떼기 시장 같은 불편함을 수학여행 온 기분으로 치환시키기로 했다. 모처럼 학생이 된 기분도 나쁘진 않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나마 흥미로웠던 건 거실 책꽂이에 놓인 책들. 아직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게스트하우스라서 거기 있는 책이라면 전부 그 젊은 주인 여자 개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을텐데 음, 베스트셀러 위주로 독서를 하는 지극히 대중적인 독자다. 취향을 파악하기는 글렀고 추측에 의하면 주인 여자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거나 그와 관련된 분야를 졸업했다. 사회복지, 여성복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전공서가 아래쪽에 꽂혀 있었는데 텅빈 책꽂이를 장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자리에 놓여있는 티가 좀 났다.
인기관을 보려면 아침 일찍 가서 현장예약을 해야만 하므로 엑스포 개장시간에 맞추어 공짜 시내버스를 타고 엑스포 정문으로 향했다. 요금을 내지 않고 타는 버스는 타면 탈수록 재미가 쏠쏠하다. 이러다 무임승차에 재미 들리는 것도 시간문제다.(실제로 나중에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탔는데 단말기에 깜빡하고 카드를 안 찍을 뻔했다)
엑스포장 정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언론 플레이에 확연히 놀아났음이 드러났다. 오, 엄청난 인파. 최근들어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을 간 게 문학구장이었는데, 그 정도의 활기만 느껴도 신났지만 이건 대단하다.(당연 비교 불가한가?) 현장 예매 키오스크 앞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대신 예약을 해주고 있었다. 엑스포를 맞이하여 여수 시내 곳곳에는 노랑과 하늘색이 섞인 상의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어슬렁거리며 관광객을 안내해주고 있었는데 여기 바로 키오스크 앞에 있는 애들이 가장 연령대가 어렸다. 엑스포장의 활기를 보태주는 존재들이라고나 할까.
엑스포장 안에는 여러 전시관들이 있는데 특히 테마가 확실하고 인기가 있을 것 같은 여덟개의 관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전부 볼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한 입장권을 가지고 하루에 두 개의 관을 예약할 수 있고 오후 여섯시가 지나면 예약없이 선착순으로 입장할 수 있지만 그것도 아쿠아리움 같은 인기관은 시간 선택권도 거의 없는데다 여섯시 이후로도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특별히 수족관을 좋아하지 않거나 바보가 아닌 이상 첫 번째로 예약하는 곳이 바로 아쿠아리움이다. 우리가 예약을 할 때에는 이미 앞 시간이 꽉 차 있어서 저녁 7시에나 입장이 가능했다. 열시 반이 되지도 않았을 무렵 방송에서 아쿠아리움의 예약이 종료되었다고 하니 유치한 의기양양함과 기대치가 동시에 상승했다. 나머지 하나 남은 선택권으로는 기후환경관을 골랐다. 음, 사실 여긴 딱히 끌리진 않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잘 아는 사람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사전 조사가 확실한 혜원의 의지에 따라 골랐는데 북극 기후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니 재미있을 것도 같다.
이제 남은 건 예약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관을 최대한 많이 둘러보는 것. 먼저 국제관을 탐방하기로 했다. 세계여행을 할 수 없는 입장에서 각 국의 특색을 조금이나마 감상해볼 수 있는 기회는 살면서 그리 흔치 않으니 만끽해야지. 인도관에 들어가니 실내에 요기와 인도코끼리상이 놓여있는 게 확실히 인도풍이다. 그런데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았는지 구석에서는 흰색 부스에 전통 문양이 새겨진 천을 씌우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엑스포 준비의 부실? 성급한 판단을 하긴 좀 이르지 하고 나오는데 벌써 인도관이 끝나버렸고 출구 쪽에는 인도관 기념품이 동대문 시장처럼 천원, 오천원, 만원을 외치면서 판매중이다. 뭐야, 이게 정말 엑스포? 어쩌면 인도의 색깔? 판매를 하고 있는 모습에 금방 엑스포의(혹은 인도란 국가의) 이미지가 저급한 상업성으로 실추되었다. 그래도 팔찌가 하나에 천원이라니까 한 번 볼까. 예쁜 꽃문양의 팔찌를 보고 마음에 들어 살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 몰라 가격을 물어보니 만원이란다. 헉. 안 살 의도를 보이며 다시 제자리에 놓으려 하니까 무구한 역사의 직업적 영혼이 깃든 이 인도 아저씨, 내 팔에 다른 팔찌까지 하나 껴주며 만원을 달란다. 하나에 만원이 순식간에 두개에 만원이 되는 순간, 그냥 웃으며 사양하고 인도관에서 나왔다. 음, 첫번째 들어간 관이었는데 뭔가 기대 이하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술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비슷한가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스피릿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초반에 확실히 기대를 꺾어준 덕에 다음부턴 무얼 보더라도 기대 이상이겠다는 기대를 할 수 있는 전화위복.
확실히 선진국 관으로 가니까 격이 달라진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뭔가를 빼먹으려는 후진국성 스피릿에서 자신의 손님들에게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베풀어주려는 선진국성 스피릿으로 급상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괜히 상향화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니까. 스웨덴 관도 그렇고 노르웨이 관도 그렇고 자기 나라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노력이 감동스럽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설치된 장비나 시설물에도 돈 들인 티가 많이 나는데 입체적인 감각을 주기 위한 영상장치는 거의 기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안내를 하거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전부 한국인인데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떤 프로정신으로 다른 나라를 이렇게 근사하게 홍보하는 걸까? 대사관 직원이라도 되나? 각 나라 관들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기에 이렇게 퀄리티가 차이나고 특색이 다른 거지? 궁금한 건 많지만 궁금할 새도 없이 당장 눈앞에 펼쳐진 볼거리 들을 거리에 금방 정신이 팔려버리고 말았다.
휴, 아직도 오전인데 조금 지쳐버렸다. 스타벅스가 있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숏을 시켰더니 행사장 안에 있는 매장이라 톨부터 주문 가능하단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용량만 판매하겠다는 셈인가? 그냥 톨사이즈로 주문해 마시며 엑스포 지도를 펼쳐 좀 더 효율적인 동선을 정하기로 했다. 이 어마어마하게 큰 행사장을 계획 없이 무턱대고 돌아다니기엔 체력이 금방 바닥나겠다.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돌아다니는 게 오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카페 내부엔 내외국인들이 줄서서 주문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뭔가 냄새도 이국적인 게 영국 스타벅스 정도에 온 기분이다.(영국에 가보진 않았지만, 뭐 스타벅스가 아무리 국제적인 브랜드라 해도 나라 냄새에 따른 미묘한 차이가 있으니까) 하늘엔 구름이 적당히 뒤덮여 있고 간혹 시원하게 바람도 살랑 부는 딱 쾌적한 날씨가 연출되고 있었다. 돌아다니기에 최적이다.
시간이 좀 늦었긴 했지만 괜찮을 거라는 혜원의 말을 들으며 기후환경관으로 가보니 역시나 괜찮았다. 입구에는 우리와 같은 열 한 시 타임 사람들이 한 떼거리로 모여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딱 우리까지로 마감되어 들어가니 어떤 영상물을 하나 틀어준다. 기후환경관이라는 모토에 맞게 지구의 기후환경에 관한 영상인데 메시지가 있다. 인간은 쉴 새 없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바다는 그걸 흡수하고 정화한다는 내용. 다음은 북극기온 체험관에 들어갈 차롄데 저 앞에 먼저 들어간 사람들 속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오는 걸 보니 춥긴 추운가보다. 막상 들어가니 춥긴 추운데, 에게, 이게 정말 극지방의 기온이야? 이 정도라면 충분히 사람 살 만 한데 라는 정도다. 여름에 무더울 때 인기관이 될 예감. 거기서 나오니 또 영상물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보여주는 동영상도 결국 메시지는 개화적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자꾸 환경을 파괴하며 살아간다면 너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 북극곰이 더 이상 살 수 없을지도 몰라요. 영상은 금방 끝나고 이게 준비된 코스의 전부다. 리플릿에 적혀 있던 예상 관람시간 20분에 딱 맞춘 셈이다. 뭐랄까. 예약까지 하고 봐야하는 특급관 치고는 좀 약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아무튼 이젠 배가 고프다. 지치기도 했다. 좌판에서 파는 소세지랑 맥주가 너무너무 맛있어 보인다.
"소세지 먹자. 맥주랑 땡기는데." 내가 말했다.
"그럼 그냥 점심을 핫도그로 떼울까?" 어쩜 내 심중을 잘 알아주는지. 혜원.
"찬성. 나는 프랑크 핫도그." 혜투.
"난 어니언 핫도그" 다시 혜원.
"그럼 나는 칠리스윗. 맥주 오백이랑. 음, 아냐. 지금 맥주 마시면 좀 힘드려나. 음, 그치만 핫도그에 맥주는 환상적인데. 아, 어쩌지. 삼백을 시켜야 하나? 아냐, 삼백은 뭔가 부족한데."
결국 오백을 시켜 나눠마시기로 했다. 술을 마시는 데에도 체력이 필요함을 절감하는 요즘. 술 마시면 금방 피곤해지는데 그게 요새 급격히 저하된 체력 탓이라고 믿을 뿐이다(그러고 싶다). 체력을 알고 자제력이 생겼다고 스스로 칭찬하고 싶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사실 마음껏 마시고도 금방 회복되던 옛날이 그립다. 아니지, 그땐 회복이라는 걸 몰랐다. 힘든 게 없었는데 회복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저러나 칠리스윗 핫도그는 딱 예상했던 맛이지만 기대 이상으로 맛이 좋고 한 모금 두 모금 아껴서 마시는 맥주도 환상 궁합이다. 목구멍으로 술술 잘도 넘어간다.
잘 먹고 한참 쉬었으니 또 좀 돌아다녀볼까. 예약을 하지 않고 볼 수 있으면서도 줄이 좀 없는 관을 공략하려는데 워낙에 인파가 많아서 그렇게 만만한 관이 별로 없다.(이건 분명 엑스포 개장 이래 최대 인파다) 수니교 건너편에 있는 주제관은 메인 관중에서도 메인이라 당연 줄이 몇 겹으로 늘어져 있었고 거기 옆에 붙어 있는 해양베스트관은 그나마 좀 낫다. 바다 탐색을 위한 과학 기술의 획기적 진보를 보여주며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한껏 고조시켜주는 멋진 관이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잠수할 수 있다는 신카이 6500도 볼 수 있었는데 창유리가 어마어마하게 두껍다. 물기둥 10m가 누르는 것이 1기압인데, 저 잠수정은 말 그대로 6500미터 해저까지 탐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다. 해저 6.5킬로미터라, 딱 들어서는 별로 감이 안 온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가 대략 8.8킬로미터니까 엄청나게 깊은 건 알겠는데 그 아래 기압의 정도가 실감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카이 6500의 유리창 두께를 보면 음,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제일 큰 크루즈도 보고(모형이지만) 진짜 갈라파고스 바다코끼리 거북도 보고(박제지만) 재밌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기 위한 아이디어가 착상된 갈라파고스 섬 위치가 어딘지 항상 궁금했는데 라틴 아메리카 땅에서 서쪽으로 1000킬로미터 떨어진 적도 부근에 붙어 있다. 에콰도르 영토란다. 그렇게 되면 또 궁금하다. 에콰도르는 어디 붙어있고 어떤 나라지? 거기까지는 좀 삼천포고 나중에 조사해봐야겠다.
다시 국제관으로 왔는데, 지칠 대로 지쳤다. 해가 쨍쨍하지는 않아도 덥고 잠도 푹 못 잔데다 맥주도 마셨겠다, 눈이 마구 감겨서 평소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곳을 결사적으로 피하던 습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긴 의자 빈자리만 찾아 등 대고 누웠다. 얼굴에 여기저기서 받아놓은 팜플릿 하나 펼쳐 가리고 눈을 감으니 잠이 솔솔 온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엄청나게 단 한 잠.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혜투는 아직도 쌩쌩한 체력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저질 체력의 개선 필요를 느끼며 급속 충전한 체력을 바탕으로 다시 몸에 원기가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탄력 받아 국제관 중 재미있어 보이는 아랍에미레이트 관으로 갔다. 여기도 줄을 세운 다음 시간대에 맞춰 입장하는 곳인데 기다리는 입구에 볼 거리들을 꽤 놔둬서 제법 흥미로웠다. 아랍에미레이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버즈 두바이가 있고 두바이 항공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란으로 가려면 먼저 두바이 항공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 정도. 거의 아는 것이 전무했는데 여기 와서 알게 된 건 아랍에미레이트가 아부다비, 두바이 등 7개 토후국과 연방하여 연합국으로 건국 된지 40여년이 되었고, 수도는 아부다비, 가장 큰 도시는 두바이라는 것. 엄청난 석유를 보유한데다 고대부터 무역으로 먹고 살아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 굉장한 부호들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 들어가니 영상물을 틀어주는 건(이제 별로 참신하지도 않다) 다른 관과 다를 게 없는데 등받이가 있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영화관처럼 감상할 수 있는 건 좋다. 10분짜리 짧은 영상을 통해 보이는 메시지는 역시나, '지구인 여러분, 환경 파괴는 이제 그만~.' 한 꼬마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바다를 여행 중 거북이가 비닐봉지를 먹고 결국 죽어버리는 걸 보고는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여 거북이를 보호하는데 앞장선다는 이야기. 실제로 아랍에미레이트는 2013년부터 비생분해성 비닐봉지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는데 오, 이건 제법 참신하다. 비닐봉지 없는 세상을 산다는 건 이미 불가능한 2012년 현재 대한민국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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